[조경란의얇은소설] 완벽한 오렌지 한 알
폭풍우 치던 밤에 구원 받아
엉망이 된 그의 가게 치우며
작은 위로의 징표, 품에 건네
로런 그로프 ‘살바도르’(‘플로리다’에 수록,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이렇게 헬레나는 살바도르에서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집에서는 해보지 못하는 것들을 해보는 일시적 자유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생겨버렸다. 길 건너편 식료품점 주인 남자. 헬레나가 숙소를 드나들 때마다 마주치게 된다. 주로 밤에 그녀가 혼자가 아닐 때. 그가 그녀의 비도덕적인 부분을 지적하는 것처럼 흘끗 보았을 때 헬레나는 그에게 어떤 이야기, “어머니의 병환이라는 황무지에서 보낸 길고 건조한 시간에 대한 절박하고 진실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상하다. 왜 여행지에서 사람은 종종 처음 만난 이에게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까. 서로의 언어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데도.
단편에서 인물이 두 명밖에 나오지 않을 때 비, 폭풍 같은 요소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안전한 장소를 불안의 장소로 바꾸어버리는 등의. 헬레나가 숙소에서 뛰면 일 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의 호텔에 다녀오던 밤에 폭풍우가 몰아쳤다. 숨을 틀어막는 듯한 비바람과 두려움 때문에 헬레나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인정했다. 앞으로도 자신이 늘 혼자이며 여기서 쓰러진 후로도 그러리라고. 그때 갑자기 뭔가가 폭풍우를 뚫고 달려 나왔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끄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눈을 뜬 곳은 정전되고 물이 차오르는 식료품점 안이었다. 치한이라고 여겼던 주인과 단둘이. 그녀는 자신이 폭풍으로 고립된 이 밤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긴장을 풀지 못한다. 가게 주인이 다가와 웅얼거리며 헬레나의 다리에 한 손을 얹자 그녀는 손에 든 병을 무기처럼 쥔다. 그리고 아침.
폭풍우가 지나간 거리는 깨끗하고 환한 햇살이 반짝거리고, 헬레나는 간밤에 주인이 자신을 만진 데가 다리의 상처 주변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에서 간밤엔 돌봄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도. 돌보는 일은 타고난 역할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어느 어렵고 곤란한 순간에 자신을 돌봐줄 수도 있을 거라고는 알지 못했다. 그 경험을 여기, 살바도르에서 했다. 그를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해 헬레나는 폭풍에 엉망이 된 가게 바닥에서 물건을 줍는 그를 따라 허리를 숙여 이것저것 주워 올리곤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 안겨준다. 펜, 쿠키, 바나나 한 송이. 그리고 작가는 마지막에 이 단편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이미지이자 상징, 독자도 느끼면 좋을 작은 구원의 표상으로 이 한 가지 사물을 더 보탰다. “표면이 고르고 깨끗한 완벽한 오렌지 한 알”.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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