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재심 개시…인권위가 직무유기로 비판받는 이유는
박준영 변호사 “사회적 약자, 인권위가 안 도우면 누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직무유기입니다.”
2009년 발생했던 이른바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옥살이를 했던 백아무개(74)씨 부녀의 재심 개시를 대법원이 19일 확정하자 인권위의 한 직원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한탄했다. 인권위는 지난 5월2일 열린 제11차 상임위원회에서 이 사건 재심청구와 관련된 의견 제출의 건을 심의하고 전원위원회에 최종 심의 의결을 넘겼지만, 5월20일부터 전원위가 표류하면서 논의는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 그 사이 대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하면서 안건은 폐기됐다.
앞서 광주고법은 지난 1월4일 백씨 부녀가 중형 확정판결을 받은 이 사건에 대해 재심청구를 인용했으나 검찰의 즉시항고로 대법원 심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인권위는 “인권의 보호와 향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재판이 계속 중인 경우 법원 또는 헌법재판소의 요청이 있거나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법원의 담당 재판부 또는 헌법재판소에 법률상의 사항에 관하여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는 조항(인권위법 제28조)에 따라 이 사건 관련 의견제출 건을 심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원위가 소모적 논쟁으로 파행을 빚거나 일부 위원들의 보이콧 등으로 열리지 못하는 가운데,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가 검찰의 즉시항고를 기각하면서 인권위법 취지에 따라 상정됐던 안건은 더는 심의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은 2009년 7월6일 전남 순천에서 발생했다. 청산가리를 넣은 막걸리를 마신 2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인 최씨의 남편 백씨와 딸이 범인으로 지목돼 기소됐다. 백씨 부녀는 2010년 2월 1심에서는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2011년 2월 항소심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으로 뒤집혔다. 2012년 3월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백씨 부녀는 대법원 판결 10년 뒤인 2022년 1월 “검사가 유죄 진술을 유도했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이들의 변호를 맡았던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는 100편에 달하는 검찰의 영상녹화조서를 증거로 제시하며 당시 검사와 담당 수사관이 백씨 부녀를 회유·압박해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고 주장했다. 광주고법 형사2부는 “피고인에게 검사의 생각을 주입하며 유도신문을 하는 등의 행위는 현저히 합리성을 잃은 것으로 위법한 수사권의 남용”이라며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재심 과정에는 박준영 변호사가 확보한 검찰 조사 시 영상 녹화가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고 한다.
박준영 변호사는 “이들은 발달장애 경계선에 있으며, 한글도 제대로 쓸 줄 몰라서 불이익을 받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는 게 인권위의 역할이자 존재 이유인데, 전원위에 여러 차례 올리고서도 논의조차 못 해 아쉽다. 도대체 인권위가 누구를 위해 왜 있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또 “(재심으로 바로잡힌) 수원 10대 소녀 상해치사사건(일명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때 인권위가 재심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출했는데, 그 의견이 대법원 결정에 의미 있게 작용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에 대한 재심 의견제출은 현병철 위원장 시절인 2011년 11월28일 전원위에서 의결됐다.
인권위의 한 직원은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취약한 이들에 대한 방어권 보장과 형사정책적 고려가 대법원 결정에서 반영될 수 있도록 인권위가 역할을 못 한 게 두고두고 아쉽다“며 “인권위는 현안을 다루는 기관인데, 위원들의 보이콧 때문에 의견을 내지 못했다. 인권위원들이 본분을 완전히 망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인권위의 또 다른 간부도 “대법원 결정으로 인권위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인권위원들이 장기간 전원위에 참석하지 않아 벌어진 일로 인권위원들이 응당 해야 할 소임을 방기한 직무유기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창호 새 인권위원장이 주재하는 첫 전원위원회는 오는 30일에 열린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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