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조직된 시민의 힘과 역발상 정치
진정한 의미의 지방자치 보여줘…행정보다 발전적 대안 제시해야
박재욱 신라대 행정학과 교수
유례 없는 올 여름 무더위 탓만은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SNS의 동영상과 언론 보도에는 독선과 불통의 국정 뉴스가 그렇지 않아도 짜증나는 무더위에 화병을 돋운다. 이런 와중에 몇 가지 지역 뉴스에 눈이 번쩍 떠진다. 시민의 반대로 이기대 고층아파트 개발이 저지되고, 구덕운동장 재개발 사업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은 행정과 시민 간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떠나 지방자치 발전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의미 있는 계기로 받아들여진다.
부산의 대표적인 자연 경관의 하나인 이기대나 오랜 부산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품은 구덕운동장은 단순한 공간적 의미를 떠나 부산의 중요한 공공재라는 인식을 공유한다. 두 지역은 어느 개인이나 집단, 세력이 결코 사유화할 수 없는 자연적 공공재로서, 부산의 오래된 기억의 장소로서 쉽게 허물 수 없는 역사적 공공재라는 성격을 각각 지닌다. 행정으로서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에 따라 적법하게 처리한다고 주장하지만, 공공재란 단순한 행정·법적 절차나 기준만으로 처리 가능한 것이 아니다. 시민적 합의와 동의 없는 지역발전이 초래할 미래의 그림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이미 보아오지 않았던가. 해운대와 광안리 등지에 무계획적으로 자기 사익만을 능사로 삼는 개발업자의 농간과 공공성을 겉으로만 치장한 무능한 행정이 만들어낸 희대의 걸작품들을. 흉물처럼 들어선 고층 아파트 숲에서 부산은 과연 일자리를 얼마나 창출했고 기업은 앞 다투어 부산으로 걸음을 옮겼으며, 재정은 또 얼마나 풍부해졌던가. 오히려 출산율은 여전히 감소하고 청년의 서울행만 더 늘지 않았던가.
뭐라도 해야 한다는 행정의 절박감과 노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기업도 유치해야 하고, 아파트 부지라도 팔아 그 재정으로 중앙정부의 재개발 사업 지원이라도 받아 늘어나는 빈집도 정리하고 날로 심각해지는 원도심의 노후화도 막아야 한다는 논리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부산 최고의 자연 경관을 망가뜨리고, 오랜 부산의 심장 같은 기억의 공간을 지우는 건 아니다. 부산의 장기적 미래를 염두에 둔다면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다른 대안을 찾아보아야 하는 게 옳지 않은가.
이 과정에서 이전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민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반대와 노력이 큰 성과를 얻어냈다. 이기대 부지를 소유한 건설업체는 아파트 건설을 포기하면서 공공성 높은 시설물을 재검토하겠다며 물러섰고, 구청장 주민소환까지 각오하고 반대 의사를 표명한 시민의 반대에 서구청도 부산시도 재검토 의사를 표명했으며, 결국 국토부의 재개발 지원 사업에서 탈락했다.
지방자치, 주민자치라고 하는 게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다. 시민의 조직된 힘만이 자신의 열악한 처지를 바꾸고 새로운 생활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명제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란 말은 그의 유언처럼 묘비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촛불을 들고 광장을 메우며 정치와 권력을 응징하고 저항하는 것만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시민의 조직된 힘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진영논리로 똘똘 뭉쳐 상대방 진영을 적대시하고 혐오하는 퇴행적인 조직의 힘이 아닌 자기가 살고 살아갈 지역과 생활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나서는 시민의 모습에서 지역발전과 민주주의의 앞날을 기약해 본다.
조직행동론에서 말하는 조직시민행동은 지방자치나 지역발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한 마디로 단순한 경제적 보상과 무관하게 조직구성원이 조직을 위해 행하는 자발적인 행동을 조직시민행동(OCB)이라 말한다. 조직이나 기업에서 생산성을 증대하고 조직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기본 개념이다. 자율적이며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지역의 조직구성원, 즉 시민의 이타적이며 자발적 행동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상호 협력적인 시민정신이 지역의 조직시민행동에도 적용된다.
참다운 시민의식이란 지역의 변화에 책임의식을 갖고 솔선수범하는 시민적 태도, 지역에 대한 자조감과 불평, 불만보다 공정성을 앞세우며 기존 선입견과 관행을 넘어서려는 역발상적 아이디어를 찾으려는 초월적 시민적 자각을 말한다. 이제 행정이 의도하려던 정책을 조직화된 시민의 힘으로 저지했으니 시민은 행정이 제시한 정책보다 더욱 비전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참신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책무를 감당해내야 한다. 그래야 모처럼 성취한 시민의 힘을 더욱 결속시키며 자기 권리의 정당성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반대를 위한 반대, 속빈 강정처럼 ‘떼법’으로 고집만 피웠다는 핀잔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역 소생을 위한 역발상의 정치적 도전과 용기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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