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은 소리요, 영남은 춤…소리가 춤을 부른다 [진옥섭 풍류로드]

한겨레 2024. 9. 1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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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_영남무악(嶺南舞樂)

바람을 불어 넣은 관악기의 지속음이 춤의 현재진행형을 가능케 한다. 이 지속음을 좀 과장한다면, 지하철 환풍구 바람 같다. 훅하니 올라오는 바람에 치마를 쓸어내리면 ‘7년 만의 외출’의 매릴린 먼로가 되고, 저절로 팔이 들리면 승무의 명인이 되는 것이다.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추어지게 만드는 게 삼현육각이다.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남해안별신굿은 세습무에 의한 갯마을의 풍어제이다. 11대 무업을 잇는 정영만 일행이 마을에 들어가며 매구(풍물)를 울리고 있다. 꽹과리 정영만(인간문화재), 무녀 정은주(장녀), 장구 이현호(제자), 북 정승훈(막내), 태평소 정석진(장남)이다. ‘라운드테이블’ 이진환 제공

조선 시대 한양에서 부산포를 최단 거리로 가는 가장 높고 험한 고개는? 정답은 문경새재다. 이 고개를 굽이굽이 넘는 한양과 부산포 간 천릿길은 조선왕조가 의주로(義州路) 다음으로 중시했던 영남로(嶺南路)다. 왜(倭)로 내려가는 조선통신사의 길이었으며, 괴나리봇짐의 선비들이 오르던 과거길이었다. 당연지사 최단 거리가 필요했었다. 이 첩경을 막아선 험준한 백두대간, 그래서 일찍이 조령(鳥嶺, 문경새재)이 개척되었고, 조령 이남을 영남(嶺南)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즉 영남무(嶺南舞)란, 문경새재 아래 경상도 땅의 춤을 일컫는 말이다. 옛말로 ‘호남은 소리요, 영남은 춤’이라 했듯, 영남의 최고 명물 중 하나가 춤이다. 조령에서 조선 시대로 드론을 띄운다면, 영남로가 63읍을 통과할 때 고을고을에 춤판이 찍히고 있을 거다. 이 질펀한 길이 경상좌도(낙동강 동편, 한양에서 볼 때 좌측)의 종점에 밀양, 양산, 동래의 춤사위를 퇴적하였다. 또한 김천에서 3번 국도로 빠져나온 경상우도(낙동강 서편)의 아랫녘 진주, 사천, 고성, 통영에 장쾌한 춤이 비옥한 삼각주를 이루고 있다.

지금도 영남은, 우도건 좌도건 춤이라면 “우(右)하니 몰려와 좌(左)하니 빠져나간다.” 춤을 추기 위해 계(契)를 맺었고 봄이면 화톳불을 피우고 탈을 쓰고 뛰어나갔다. 가을이면 “덩!”하니 북을 울려놓고 그 동심원 속으로 솟구쳤다. 어디 춤꾼뿐인가. 구경꾼도 제 그림자까지 데리고 뛰어드니, 마침내 춤이 ‘천지빼까리’(온세상에 널려 있음)로 꽉 차는 땅, 그곳이 영남이다. 오늘도 영남 땅 곳곳에서 춤판이 설 것이다.

이쯤에서 한 문제를 더 내보자.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은? 내가 들은 정답은 “해삼에 맨 처음 입댄 놈”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문제 낸 이가 “쳐다봐라 처먹게 생겼는가”하며 해삼을 꿀꺽 삼켰다. 그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지금이야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지만, 생겨도 참 흉측하게 생겼다. 그러니 맨 처음 집어 먹은 자, 얼마나 간이 큰 사람인가. 30년 전, 통영 바다에 걸터앉아 정영만(1956년생)의 바다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바다, 듣기만 해도 낭만적인 곳이다. 그러나 뱃사람들은 “판자 한 장 밑이 지옥”이라 한다. 그 말도 부족하여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라고 말한다. 이 위태로운 삶을 위로하는 게 굿이고, 이를 주관하는 이들이 세습무였다. ‘찬물에 기름 돌 듯’ 따돌려졌지만, 비린내 나는 선창을 이해하는 실사구시의 지식 집단이요, 경건한 사제 집단, 대물린 음악 집단이었다.

정영만은 3살 때 강보에 싸여 굿을 교습하는 신청(神廳)에 건네졌다. 스승들은 모두 친인척이지만, 언제나 회초리가 먼저였다. 통제영 악사의 후예인 스승들의 산수계(山水契)는 모이는 순간 축제가 되었다. 6살에 산수계에서 승무를 추었고, 8살 때는 이미 굿판의 피리로 소문이 났다. 충렬사나 제승당에서는 충무공 제례악을, 한산대첩제에서는 대취타를 연주했다. 밤이면 요릿집에서 춤 반주를 했고, 할아버지를 따라 마산과 부산까지 놀음을 나갔다. 도무지 학교에 다녀올 여가가 없었다.

어릴 땐 “새끼무당”, 커서는 “무당 새끼”가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고 신청도 헐렸다. 무당이라고 몰매를 맞았고, 손가락질은 꿈속까지 쫓아왔다. 몸서리치며 버티다 굿을 떠났다. 점원, 선반공, 선원, 배 기관장, 택시기사로 전전했다. 개인택시로 기틀을 잡던 1987년, 가문의 굿이 국가무형유산 남해안별신굿으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일부터 한 분씩 세상을 떠났고, 모두의 마지막 말은 “너밖에 없다”였다. 자신도 이명처럼 피리 소리가 귓전을 돌았다. 결국 유턴하여 개인택시를 판 종잣돈으로 굿을 시작했다.

인간문화재 정영만은 원래 피리잽이였기에 소릿길에 밝다. 그래서 그의 구음(口音)은 춤 길을 잘 인도한다. 구음은 “나르디 나니낫…”, 특정한 가사 없이 춤 반주에 얹는 소리다. 징소리로 춤꾼의 발밑에 장단을 고여주고 목소리로 춤의 각본을 그려낸다. ‘라운드테이블’ 이진환 제공

1993년 대전 엑스포 놀이마당 ‘열림굿’으로 굿의 현존을 알렸고, 갯마을을 설득해 다시 굿을 하게 했다. 그러나 악사가 없어 왼손은 징, 오른손은 피리를 불어야 했다. “비디오 볼래?” 만화영화로 알고 달려온 삼 남매(은주·석진·승훈)에 굿 비디오를 보여줬다. 제자가 되겠다고 맹세한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손님처럼 떠나갔다. 아버지와 주소가 같아 달리 갈 곳 없는 삼 남매만 어쩔 수 없었다. 큰딸이 녹화해 애지중지하는 에이치오티(HOT) 비디오 10개에 모두 굿을 녹화해 닳도록 틀어줬다. 그렇게 일가족을 끼고 오로지 굿으로 직진하였다. 30년이 흘렀고, 주소가 달라진 삼 남매가 한 무대에 섰다.

2023년 8월 국립무형유산원 ‘이수자전’, 정은주는 해금, 정석진은 피리, 정승훈은 대금으로 나섰다. 첫 무대에서 산조, 삼현육각, 시나위까지 기악의 철인삼종을 단번에 통과했다. 그리고 누나가 일어서서 무가를 부르고 두 동생이 타악, 기악, 구음으로 바라지했다. 불행했던 ‘조상 찬스’를 놓치지 않고 단독 드리블과 삼각 패스로 판을 막았다. 조상들이 아버지의 잔소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삼 남매에 강림한 모양이었다.

2023년 12월, ‘넋 노래 정영만’이란 제목으로 ‘신청’과 ‘산수계’ 시디(CD) 2장에 무무악(舞巫樂) 10곡을 녹음하였다. 11대 무가를 잇는 정영만이 12대가 된 삼 남매, 그리고 진득한 제자들과 함께했다. 괄목할 곡이 영남의 ‘삼현육각’이었다. 좌고, 장고, 피리 2개, 대금, 해금으로 구성되는데, 악기가 모두 대나무여서 ‘대풍류’라고도 한다. 바람을 불어 넣은 관악기의 지속음이 춤의 현재진행형을 가능케 한다. 이 지속음을 좀 과장한다면, 지하철 환풍구 바람 같다. 훅하니 올라오는 바람에 치마를 쓸어내리면 ‘7년 만의 외출’의 매릴린 먼로가 되고, 저절로 팔이 들리면 승무의 명인이 되는 것이다.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추어지게 만드는 게 삼현육각이다.

“영남무란 무엇인가?” 시디를 듣다 자문했다. 사실은 여태 제대로 된 춤 음악이 없었다. 동래와 진주의 삼현육각이 오래전에 그쳤기 때문이다. 결국 호남과 경기의 음악에 맞추면서, 영남무라 말하길 서슴지 않았던 거다. 이런 석연치 않은 때, 산수계의 음악이 되살아났다. 1932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부산 동래, 마산, 진주, 고성, 통영 등 기타 각지를 망라한” 음악이다. 정영만 일가가 30년 수공으로 찌릿찌릿한 소리를 내니, 영남무에 눈부신 축복 아닌가. 헤드폰을 벗고 부산의 영남춤축제에 판을 제안하였다.

2024년 8월3일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영남무악’을 올렸고, 9월11일 남산국악당에서 서울세계무용축제 초청작으로 공연했다. 삼현육각과 더불어 정영만의 ‘구음 시나위’가 압권이었다. 구음(口音)은 “나르디 나니낫…”, 특정한 가사 없이 춤 반주에 얹는 소리다. 구음이 좋으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을 춘다” 했다. 정영만의 묵직한 남 저음의 목청으로 춤을 감싸는 구음은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 소리다. 이내 청을 올리면, 빠져나가지 못한 슬픔이 희게 번져 마블링된 음의 육질이 드러난다. 그 흰 소금기가 삼투압처럼 관객의 심금을 심하게 끌어당겼다.

행여 이 말을 의심커든 ‘2024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BPAM)’에 오시라. 10월5일 ‘영남무악’이 공식 초청작으로 해외 마케터 앞에서 공연된다. 안다고 고개 들면 안 되는 것처럼, 그간의 갈채에 자만하지 않겠다. 전통 춤판의 성패는 당일 추임새 좋은 관객을 만나는 게 관건이다. 춤의 시간을 영원한 현재로 고정하는 “얼씨구!”가 폭죽처럼 터지게 하소서.

옛적 영남 선비들은 과거 보러 갈 때 꼭 조령(문경새재)을 넘었다. 같은 고개라도, 죽령을 넘지 않았다. 죽죽 미끄러지니까. 추풍령은 더욱더 피했다. 추풍의 낙엽이 되니까. 그들은 문경(聞慶)을 지나 새재를 넘었다. ‘들을 문(聞)’, ‘경사 경(慶)’, 급제라는 경사스러운 소리를 듣기 위한 기원이었다.

영남무악을 위해 문경을 거쳐 내려가야겠다. 가다가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에서 정영만이 펼칠 선율의 그물을 헤아리리라. “털 하나 안 빠지게 꽉 찬 소리”, 거기에 얹힐 찰진 구음을 기원하리라.

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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