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올랐다 결국 못 돌아온 ‘4·3 영혼들’ 그리려 했죠”

허호준 기자 2024. 9. 1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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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17m 대작 ‘그 겨울로부터’ 전시하는 김영화 작가

작품 ‘그 겨울로부터’ 앞에 선 김영화 작가.

“이 수풀 어딘가에는 산에 올랐던 사람들 자취가 있잖아요. 그리고 그 숲에서 마지막을 보낸 이들이 있지요. 수풀 속에 사람이 숨어있는 듯한 느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수풀 어딘가에 아직도 영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제주4·3 당시 피난과 항쟁의 서사가 담긴 대작을 붓펜으로 그린 김영화 작가는 작품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작품은 1948년 겨울, 죽음을 피하거나 혹은 항쟁의 대의명분을 가지고 산에 오른 이들의 눈 속 발자국에서 시작된다.

숲에 새 생명이 돋아나고, 온갖 생물이 살아 숨 쉬는 봄이 왔지만 사람들은 내려오지 않았다. 초여름 숲은 6월 때죽나무의 하얀 별꽃이 마치 눈 내린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무수히 떨어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김 작가가 그린 ‘그 겨울로부터’는 가로 17m, 세로 2m60~2m70의 대형 작품이다. 작품은 여름이 돼도 내려오지 못하고 숲 속의 별이 된 이들과 항쟁의 대의에 나섰던 이들을 기린다.

붓펜으로 그린 길이 17m 크기의 작품 ‘그 겨울로부터’.

“어쩌면 봄을 생각하며 올랐을 이들에게 결국 봄은 오지 않은 거잖아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안고 올랐던 산인데 결국은 돌아오지 못한 제주사람들을 그리고 싶었어요.”

작품의 무대는 ‘이덕구 산전’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지금은 시민과 관광객의 힐링 명소인 제주시 조천읍 사려니숲. 그 길에서 벗어나 20~30분 남짓 내창(하천)을 건너고 수풀을 헤치며 오르면 이덕구 산전을 만날 수 있다.

제주시 봉개와 교래리 주민들의 피신터이자 제주도인민유격대사령관 이덕구가 이끄는 무장대의 은거지였다고 전해진다. 이덕구는 1949년 6월 이 부근 어디선가 최후를 맞았고, 그의 주검은 형틀에 묶인 채 제주시 관덕정 앞 광장에 전시됐다.

김 작가는 시인 김경훈의 “죽어서 억울한 게 아니라 죽어서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게 억울하다”는 시구를 떠올리며 3년 전부터 작품을 구상했다.

“2021년 4·3미술제에 사용할 메인 포스터 이미지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이덕구를 그린 적이 있어요. 이덕구의 모습은 증명사진과 나중에 죽은 뒤 조롱의 숟가락을 꽂고 형틀에 내걸린 사진밖에 없었어요. 그때 조롱의 숟가락 대신 진달래를 그리고 주검의 사진보다는 숲인 듯 사람이 숨어있는 듯한 느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김 작가는 그때부터 언젠가는 그 숲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3년의 시간이 흘러 올해 1월부터 스무 차례 넘게 그 숲을 다녔다.

겨울을 담기 위해 눈이 내린 숲을 4∼5차례나 답사했다. 눈이 너무 내려 차량이 통제될 때도 있었고, 폭우가 쏟아져 하천을 건너지 못할 때도 있었다.

“풀 한 포기도 허투루 그리고 싶지 않았다”는 작가의 말답게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 앞에 서면 숲에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든다. 피난과 항쟁의 상징인 발자국을 밟고 제주고사리가 숨 쉬고 칡넝쿨이 감겨 올라간 오래된 제주의 나무들과 수풀을 헤치며 따라가다 보면 때죽나무에서 떨어진 별꽃들이 보인다.

한국출판문화상 받은 그림책 작가

작품은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하루 3시간 남짓 자면서 오직 붓펜으로만 그렸다. 붓펜 한 개에 20시간 정도 그릴 수 있다.

작품을 그리는 데 사용한 붓펜 131개가 작업 공간에 함께 놓여 있다. 그는 현장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스케치를 하지 않고 눈과 마음으로만 담았다. 그 느낌 그대로 작업실로 갖고 와 화폭에 담았다.

“몸과 마음이 고됐어요. 사다리 위에 올라가거나 의자에 앉아 그리고,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대형 그림이어서 뒤로 물러나서 확인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어요. 한지 15폭을 사용했는데 한 칸씩 계절이 지나는 걸 보고 와서 그리고, 그다음 계절이 오면 또 보고 와서 그리고 그런 식으로 그렸습니다.”

작품 ‘그 겨울로부터’를 그리는데 사용한 붓펜 131개 옆에 선 김영화 작가.

그림 속에는 사람이 없다. 발자국만 있다. “숲 사이 어딘가에는 사람들의 영혼이 있겠지요. 과거의 사람들, 지금의 사람들, 그리고 75년 동안의 발자국이 저 숲과 땅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자국만 그렸고, 일부러 사람은 그리지 않았습니다.”

작품에는 인물 대신 까마귀와 나비가 등장한다. “매번 갈 때마다 영혼들에게 올릴 술 한 잔 들고, 일부러 까마귀가 먹으라고 간식거리를 싸고 다녔어요. 한두 번 얻어먹더니 까마귀들이 내가 가면 아는체해요. 까마귀는 제주도 신화 속에서 이승과 저승의 연결자 또는 안내자 역할을 하잖아요. 그런 안내하는 역할로서 까마귀의 시선을 따라가도록 했고, 나비는 그 숲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이지요.”

김 작가는 몇 권의 그림책을 낸 그림책 작가이기도 하다.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2022)은 한국출판문화상과 대한민국 그림책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제주민예총이 4·3 당시 초토화돼 없어진 서귀포시 안덕면 무등이왓 마을에서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이라는 프로젝트로 조농사를 지어 술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그린 그림을 모은 작품이다.

지난 8월 27일부터 20일까지 자신의 작업장이자 전시장인 ‘창작공간 낭썹’(제주시 관덕로 6길 11)에서 딱 한 점만 내걸고 개인전을 가진 김 작가는 오는 12월엔 서울 을지로에서 전시회를 연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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