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도시’ 여수에 현대미술의 푸짐한 한상

노형석 기자 2024. 9. 1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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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여수국제미술제 현장
여수 엑스포 전시홀 디(D)4 전시실에서 상영 중인 덴마크 작가 제스퍼 저스트의 2015년작 단채널 동영상. ‘예속’이란 뜻의 프랑스어 표제 ‘Servitudes’가 붙었다.

‘음식 갖고 장난 치면 안 된다’는 말은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가장 묵직한 가르침 중 하나다. 숱한 이산의 비극 속에 헐벗고 굶주리는 일이 다반사였던 이 땅의 선조들에게 음식은 목숨 자체로 인식됐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사정은 확 바뀌었다. 국내외 현대미술 작가들에게 먹거리는 삶을 부지하는 차원을 넘어 사람 사이의 감각과 관계를 공유하고 생명과 생명의 순환을 일깨우는 매개체로서 의미를 발산하는 중이다.

미술이 음식을 주목한 지는 오래됐다. 1960년대 팝아트 대가 앤디 워홀이 대량 생산된 수프 깡통을 실크스크린 판화 소재로 채택해 이름을 날리면서 대중적 먹거리들은 미술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엔 관객과 작가의 소통을 작업 개념으로 중시하는 ‘관계 미학’이 크게 유행하면서 사람들과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는 행위 자체가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소울푸드 & 블랙칵테일’이란 이색 먹거리 관련 주제로 지난달 30일 여수 엑스포 전시홀에서 시작한 ‘2024 여수국제미술제’는 이런 현대미술 흐름을 해산물 풍성한 맛의 도시에서 현장성 있게 풀어내려는 시도로 비친다.

엑스포 전시홀 디(D)동이 출품작 공간이다. 호남과 여수 지역 작가들의 특별전과 특별초대전이 마련된 디2 전시실을 제외한 나머지 디1, 디3, 디4 전시실에서 국내 작가 24명과 8개국 국외 작가 9명의 작품 10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자기 몸의 확장, 공동체적인 교류의 마당, 시류나 미래 비판의 일환으로 음식문화를 투시하는 현대미술가들의 다기한 작업들이 모였는데, 서로 끌어당기는 음식과 시각예술의 인연을 뜯어보고 성찰한 이색 영상과 설치물들이 눈에 띈다.

디(D)4 전시실 안쪽에서 볼 수 있는 이탈리아 작가 트라스파렌트의 단채널 동영상 ‘RAW’의 한 장면.

가장 돋보이는 건 영상물들을 주로 전시한 디4 전시실의 출품작들. 산만한 나열식 구성 속에서도 덴마크 작가 제스퍼 저스트의 2015년작 단채널 동영상은 단연 돋보이는 내공을 보여준다. ‘예속’이란 뜻의 프랑스어 표제 ‘Servitudes’가 붙은 이 동영상에선 손에 거추장스러운 기계 장치를 달고 불편하게 옥수수를 먹는 여성의 모습이 되풀이되는데, 일상적 생존 행위까지 관여하는 사회적 통제 시스템이 미래에 만연할 수 있다는 경고를 담았다.

이탈리아 작가 트라스파렌트의 단채널 동영상 ‘RAW’는 가축을 도축해 먹거리로 만드는 장면을 흥미진진한 제의적 다큐로 만들었다. ‘날것의’란 뜻의 영어 형용사를 제목으로 단 이 작품은 대만 도축업자들이 도살된 돼지 수백마리를 칼로 잘라내 고깃덩어리로 해체하는 작업 공정을 샅샅이 훑고 들어간다.

작가의 앵글은 도축과 해체 작업을 인간 삶을 위한 의식 행위의 일환처럼 포착하고 재구성해 보여준다. 정혜정 작가의 설치영상들은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활용해 도시를 나는 비둘기, 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나중엔 바닷속 멍게의 일부분으로 변해가는 작가 자신의 몸을 비춘다. 명확히 구분되는 생물학적 특징마저 허물어버리는 작가 특유의 생태적 상상력이 생경하면서도 참신하다.

디1 전시실에서 눈을 확 끌어당기는 작품은 다분히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이룬 이피 작가의 ‘음식물의 환생’(2023)이다. 작가는 식탁을 사람들이 먹은 온갖 생물들이 돌기, 덩어리, 곡선의 형상이 뒤얽힌 미지의 생명체 형상들로 새롭게 이미지를 바꿔 나타나는 환생의 무대로 삼았다.

그들이 사람과 의례적인 방식으로 관계의 순환을 이룬다는 상상을 풀어낸 역작으로, 현장을 찾은 평단 전문가들의 상찬을 받았다. 과학실험실에서 곰팡이나 세포를 담는 용기로 쓰는 페트리 접시 위에 말린 씨앗이나 투박한 쇳조각, 플라스틱 파편 등을 놓고 위에서 찍어 마치 17세기 바로크 시기 인생무상 교훈을 담은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정물화 같은 구도를 연출한 미국 작가 수잔 앵커의 연작들도 강렬하다.

디(D)3 전시실에 나온 정정엽 작가의 1997년작 ‘김장’.

디3 전시실에선 정정엽 작가가 1997년 그린 유화 대작 ‘김장’을 볼 수 있다. 세폭의 화폭을 잇댄 가로 약 4m의 길쭉한 화폭에 가을철 김장에 쓰기 위해 촌사람들이 공들여 쌓아올린 빨간 고추더미의 정경을 그렸다. 한국인의 식생활과 잇닿은 먹거리 수확물들에 켜켜이 깃든 생명의 힘과 노동의 자취를 건실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과 미술품을 창작하고 감상하는 건 기술과 안목으로 물질이나 다른 생명의 부분 또는 전체를 가공해 감각으로 흡수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박순영 예술감독은 미각의 도시로 유명한 여수에서 먹거리가 생명은 물론 사회, 세계, 우주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순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쉽게도 작품들을 주제에 맞춰 꿰어내는 기획의 힘을 찾기는 난망하다. 기획자의 의도와 작가들의 상상력은 항온항습이 안 되고 거친 에어컨 날바람이 불어오는 낡고 허름한 전시공간 안에서 산산히 흩어질 따름이다.

2012년 여수 엑스포 이래 정부투자금 상환문제로 기획재정부와 엑스포재단을 운영했던 해양수산부의 알력이 장기화했고, 그 여파로 엑스포 전시홀은 10년 이상 창고처럼 방치돼 왔다. 안전하게 전시할 여건도 안 되는데, 3억원도 안 되는 예산만 주고 유력 작가들에게 출품을 사정하며 급조 전시를 꾸리도록 조장하는 지자체의 해묵은 관행을 바꾸지 않는 이상 국제미술제의 밝은 미래는 기대할 수 없을 터다. 10월3일까지.

여수/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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