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6. 파주 타임앤드블레이드박물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있는 ‘타임앤드블레이드박물관(Time & Blade Museum)’을 찾으며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박물관 외벽 중앙에 새겨진 문장에 어떤 뜻을 담았을까. 시간을 통제하는 왕의 얼굴, 칼날처럼 강인한 독수리의 날개와 사자의 다리를 가진 상상의 동물 형상이지만 신기하게도 조화롭다. 입구에 3시5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등에 둘러맨 근육질의 사나이를 부조한 것도 박물관의 설립 이념을 담고 있는 듯하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뤄진 타임앤드블레이드박물관은 세계적인 명품 시계와 명검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이름난 곳이다.
■ 살아있는 유물과 만나다
전시실로 이어지는 좁은 복도에도 멋스러운 벽시계가 가득 걸려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기름이 묻은 장갑을 끼고 작업 중이던 이동진 관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가득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전시실은 조용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시된 시계 대부분은 ‘밥을 줘야’ 작동되는 기계식 시계들이다. 태엽을 감아주면 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 ‘살아있는 시계’란 뜻이다.
멋과 품격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시계 사이에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역사적 인물과 마주한다. ‘종의 기원’으로 진화론을 입증한 찰스 다윈의 초상이 갈라파고스의 거북 등뼈로 케이스를 만든 ‘파텍필립’ 회중시계와 나란히 있다. 프랑스의 백옥으로 조각한 사자상 탁상시계, 당초무늬에 달리는 말을 조각한 회중시계는 시계공의 예술적 감각과 소유주의 품격이 물씬 풍기는 유물이다. 이 또한 기계식이니 태엽을 감으면 바로 작동하는 살아 있는 시계다.
15세기 조선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였음을 아는가. 세계의 명품 시계들 사이에서 세종의 명을 받아 이순지가 발명한 해시계 ‘앙부일구’와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 ‘자격루’를 발견한 것은 뜻밖의 즐거움이다. 중세 스위스 시계공이 사용했던 제작 공구를 전시해 관람객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시계 공방을 재현해 놓아 관람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스위스가 시계의 나라로 불리게 된 역사가 궁금하다. “기계식 시계의 역사는 300여년이 됐지요. 태엽으로 움직이는 기계식 시계는 프랑스와 독일의 시계 기술자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16세기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신교의 칼뱅파 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지대인 쥐라산맥을 넘어 보석과 금 세공업이 발달한 스위스에 정착한다.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도피한 신교도들의 주요 직업이 시계공인데 이곳에 소규모 공방을 만들고 시계를 만든 것이 그 시작이다. 명품 시계를 제조하는 스위스를 비롯한 외국의 경우 브랜드별로 된 박물관이 따로 있다고 한다. 유럽에는 타임앤드블레이드처럼 한 번에 여러 제품을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은 없기 때문에 스위스 시계 기술자들도 이곳을 부러워한다며 뿌듯해한다.
■ 시계가 품은 흥미로운 역사와 풍성한 문화
역시 스위스는 시계의 나라다. “제네바에서 바젤로 이어지는 쥐라산맥 일대를 ‘워치밸리(Watch Valley)’라 부르는데 전 세계 시계회사의 70% 이상이 이곳에 모여 있지요.” 이 관장은 신혼여행을 워치밸리로 떠났고 매년 바젤에서 열리는 시계박람회에 참석할 만큼 시계의 나라 스위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부친께서 광복 직후에 매입한 적산가옥 창고에서 도검 두 자루와 시계를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됐지요. 196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빈티지 시계 2개를 구입한 것을 계기로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시계에 담긴 이야기와 역사, 작동 원리를 알아가며 시계의 매력에 빠져들었지요.” 우연한 동기와 세계여행을 즐기다가 유물 수집을 시작하게 됐다는 사연이 흥미롭다. 이 관장은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모두 돌아봤을 정도로 고대 유적지 여행을 좋아했다. 여행지에서 스위스 여성들이 결혼할 때 오르골이 달린 시계를 예물로 들고 갔다는 ‘뮤직 시계’를 찾아내고 오후 4시 티타임이 되면 벨이 울리는 영국의 ‘티 시계’를 구입한다. 인류가 최초로 달을 탐사할 때 암스트롱이 가져갔던 오메가 시계,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사용했던 탁상용 시계도 주목된다. 실제 그 시계가 아니라 스위스 시계 회사가 한정판으로 제조·판매한 제품이지만 박물관의 열정을 보여주는 전시물이다.
■ 역사와 시간을 가르는 검
2층 전시실은 전혀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전시실은 날카로운 검이 내뿜는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베고 자르고 찌르는 도검은 나라와 민족에 따라 모양과 길이도 천차만별이다. 대부분의 전시품이 이슬람교와 초기 기독교의 유적이 풍성한 튀르키예를 비롯해 이란, 이라크 등 서남아시아와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중앙아시아, 금속 산업이 발달한 스페인 같은 나라를 여행하며 수집한 검으로 역사와 이야기가 깃든 유물이다. 페르시아, 그리스, 중동, 몽골, 일본 등 나라별, 지역, 문화별로 색다른 칼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물론 ‘환도’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검도 만날 수 있다.
한 자루의 칼에 깃든 역사와 문화가 풍성하다. 십자군전쟁 당시 이슬람 군대의 ‘다마스쿠스검’은 전시된 수많은 검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칼날의 빛깔이나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신비롭다. 승리를 가져다준 검답게 날과 손잡이에서도 이슬람 전사의 강인한 기개가 느껴진다. 반달처럼 휘어진 단검은 초원을 호령했던 칭기즈칸 부대의 상징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정복하는 전사들의 손에 들렸던 단검의 칼집에 꽂혀 있는 것은 무엇일까. “휴대용 젓가락입니다. 단검에 꽂힌 젓가락은 칭기즈칸 전사들의 정복의 역사와 몽골인의 유목문화가 담긴 유물이죠.”
도검이 간직한 또 다른 세계를 엿보기 위해 지하 1층으로 걸음을 옮긴다. 박물관 지하 1층에 직접 검을 만들 수 있는 대장간이 설치돼 있다. “시리아에서 칼 제조법을 직접 배워와 이 시설을 만들었지요.” 칼 동호회 모임인 ‘블레이드클럽’ 회원이기도 한 이 관장은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정기모임에 참석해 박물관에서 자신이 제작한 칼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좋은 검에 대한 박물관의 열정이 뜨겁다. 그렇다면 시계와 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시계와 칼은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공통점이 많습니다. 칼과 시계 둘 다 철로 만드는데 열에 강해야 하고 녹이 슬지 않아야 해요. 달나라에 오메가 시계를 차고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금속 제조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죠. 특히 시계는 예술과 과학기술의 결정체라 할 수 있어요.” 질문을 예상했던 듯 박물관 이름을 ‘타임앤드블래이드’로 지은 까닭을 들려준다. “시계가 아닌, 타임(Time)을 쓴 것은 관람객들에게 시간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서죠.”
■ 유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전시관을 이어주는 통로에도 아주 특별한 유물이 전시됐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전투 당시 홍범도 장군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권총이다. 2020년 6월,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전시됐던 사실을 알려주는 전단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비폭력 저항으로 독립운동을 이끈 인도의 지도자 간디가 찼던 시계를 비롯해 레이건 전 대통령 퇴임 기념으로 제작된 시계도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 얼굴이 새겨진 시계, 축구 스타 베컴이 홍보하는 시계를 가까이서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시계의 역사와 구조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스위스제 시계 모형과 설계도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초등학교 교실에 이런 시계 모형과 설계도를 두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니 스위스의 저력을 새삼 느낀다.
예술과 과학이 빚어낸 명품 시계와 명검은 생명력이 길다. 하지만 날카로운 칼도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고, 정교한 시계도 긴 세월이 흐르면 멈출 수밖에 없다.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생에 정답이야 없겠지만 주어진 하루하루를 즐겁고 충만하게 채워가는 삶이 최선이 아닐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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