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본듯한…지체장애인협회장의 변심과 ‘3선 개헌’
“장애인 복지라는 대의를 위해 일해야 할 단체가 정치 놀음을 하는 곳으로 변질한 겁니다.”(한국지체장애인협회 지역협회 임원 ㄱ씨)
한국지체장애인협회(지장협)는 40만 회원이 가입된 국내 최대의 장애인 당사자 협회다. 여전히 척박한 한국 사회 장애 인식을 개선하고, 정책적 대안을 내놓는 연구 활동을 벌인다. 장애인 복지관과 작업장 운영, 장애인 관련 정부 업무 일부 대행 등 장애인 지원 활동도 활발하다. 그런 지장협이 내홍에 휩싸였다. 이른바 ‘3선 개헌’ 논란이 협회장 연임을 둘러싸고 격화한 건데, 회원들은 ‘민주적인 운영’을 요구하는 반면 논란의 중심에 선 협회장은 이를 ‘이상론’으로 일축한다. 한국 정치사의 단면이 재연되고 있는 듯한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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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시작은 협회의 헌법 격인 정관이 개정된 2020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7대 회장을 마치고 연임에 성공한 김광환 중앙회장은 ‘코로나19로 대면 총회가 어렵다’며 서면으로 임시 대의원 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중앙회장 임기를 재선까지로 제한한 규정을 없애는 정관 개정안을 서면 찬반투표로 통과시켰다. 스스로 ‘종신 집권’의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김 전 회장은 6개월 뒤인 2021년 6월 제9대 중앙회장으로 뽑혔다. 김 전 회장은 협회 내홍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이다. 그는 한겨레에 “당시 경상도·전라도 출신 후보들을 중심으로 협회 갈등이 극심했다. 이들이 ‘회장님이 다시 나오면 가만히 있겠다’고 하기에 (정관 개정에) 나선 것”이라고 했다.
정관 개정의 정당성을 둘러싼 갈등은 법정으로 향했다. 긴 다툼 끝에 지난 6월 대법원 2부(주심 신숙희)는 김 전 회장 3선의 근거가 된 임시 대의원 총회 자체를 무효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정관 변경 결의의 필요성이 보이지 않는다”, “총회 소집·개최 절차 없이 서면 결의를 해야 하는 특별한 사정도 없었다”며 지장협 회원들이 제기한 정관 개정 무효 소송을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 전 회장은 판결과 함께 회장직을 잃었다.
‘3선 개헌’ 논란 이전까지 김 전 회장은 회원들의 적잖은 신망을 받았다고 한다. ‘클린 지장협’을 선포해 협회 운영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본래 관련 규정이 없던 정관을 고쳐 중앙회장은 중임까지만 하도록 했다. 본인이 만든 중임 규정을 폐기한 건 중앙회장에 쏠린 막강한 권력 때문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지장협 정관을 보면, 중앙회장은 17개 광역 시도협회장을 직접 임명하고, 이들이 다시 230개 기초 시군구지회장을 임명한 뒤 중앙회장의 사전 승인을 받게 돼 있다. 중앙회장이 전국의 모든 임원을 임명하고 이들은 모두 당연직 대의원이 돼 다시 중앙회장을 선출한다. 한 지역 지회장인 ㄴ씨는 “아무리 유능하고 지역 회원들의 많은 지지를 얻어도 중앙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아웃”이라고 말했다.
중앙회장을 정점으로 한 극단적인 중앙집권 권력 구조는 40만 회원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김 전 회장은 올해 4월 총선에서 국민의힘 비례정당인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후보 28번으로 지명됐는데, 이를 위해 회원들을 ‘총동원’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김태호 지장협 전 사무총장은 “(김 전 회장이) 처음에 자신이 비례대표에 선정이 안 되니까 전국 시도협회에 ‘국민의힘을 탈당해라, 항의 집회를 하라’는 공문을 내렸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김 전 회장은 “장애계에서 활동하고 실력 인정받고 검증된 사람이 (국힘 비례대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엉뚱한 사람을 추천할 조짐이 보이니 반대한 것이다. (후보 중에서) 진짜 장애 현장에서 뛴 사람은 없다고 해서 내가 성질이 난 것”이라고 해명했다.
회원들은 협회의 민주적 구조를 요구하고 나섰다. 지장협 회원 ㄷ씨는 “지장협이 바로 서려면 시도협회장은 각 지역 지회장들이, 지회장은 각 지역 회원들이 직접 뽑도록 해야 한다. 임명제가 아닌 회원 중심의 협회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은 중앙집권적 구조는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김 전 회장은 “민주주의 민주주의 하지만, 중앙회장 하나만 제대로 뽑아 놓으면 강력한 조직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협회가 마비된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지금의 선거 제도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김 전 회장의 공석을 메우기 위한 지장협 중앙회장 선거가 다시 치러졌다. 김 전 회장은 ‘전임 회장’ 자격으로 직무수행자를 맡아 선거를 총괄했다. 투표에 나선 대의원도 여전히 김 전 회장이 임명한 지역 임원들이었다. ‘김광환 체제’를 반대해온 회원들은 “활동 경력 20년이 넘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경력 10년이 안 되는 황재연 전 지장협 서울시협회장이 9대 중앙회장으로 당선된 데에는 김 전 회장의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입을 모았다. 김태호 전 사무총장은 “김광환 전 회장의 9대 회장 당선 자체가 무효가 됐기 때문에 그가 임명한 임원들은 전혀 (대의원) 자격이 없는데도 그 사람들이 재선거를 치렀다. 이번 재선거 역시 무효라는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군구 지회장 ㄹ씨는 “지장협 정관을 보면, 운영위·이사회 회의록 공개도 모두 막아놨다”며 “지장협이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업무 일부를 대행하고 있는 복지부 등록 비영리법인인 만큼 복지부가 책임지고 정관 시정 권고 조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채운 기자 cw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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