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에 쓰러진 사진 보내고 "데려가라"…'사람 죽이는 제도와 문화 수준' [스프]

제희원 기자 2024. 9. 19. 09: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 스피커] "태양 아니라 '저열한 제도'가 사람을 죽게 만들어요"
 

비주류란 이유로, 마이크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의 스피커가 되는 저널리즘.
 
 
"준혁이는 '딸 같은 아들'이었어요. 항상 어디 가면 제 손을 꼭 잡고 다녔죠. 초등학교 때인가. 길에 돌아다니는 자기 몸집만 한 큰 강아지가 따라온다고 집에 데려와서는 키우고. 길고양이도 보면 캔 사료 사서 꼭 먹여주고. 잔정이 많았죠. 사랑이 많은 아들이었어요."

사고 당일, 오후 5시 9분 사측이 준혁 씨의 어머니에게 보낸 사진. 사측은 의식 잃은 준혁 씨를 햇볕이 내리쬐는 장소에 방치했고 5시 30분쯤 119 신고

'사랑이 많았던 외아들'이 에어컨 설치 회사에 취직한 지 이틀째 되던 지난 8월 13일. 준혁 씨의 어머니는 현장팀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애를 데려가라'는 문자 연락을 받았습니다. 땡볕 화단에 쓰러져 누워있는 아들의 사진이었습니다. 팀장은 "평소 (아이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작업을 하던 급식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준혁 씨가 밖으로 뛰쳐나간 지 이미 30분이 흐른 뒤였습니다.

사측은 그동안 119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준혁 씨의 어머니가 "당장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재촉하자, 그제야 동료들은 119에 신고했습니다. 폭염으로 전남 장성의 낮 기온이 34도까지 올랐던 날. 쓰러진 준혁 씨의 체온은 측정이 어려울 정도로 치솟아 있었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습니다.
 

출근 이틀째 숨진 아들... "물도 못 마시게 해"

준혁 씨는 삼성전자의 에어컨 설치 하청업체 유진테크시스템에 정규직으로 입사했습니다. 어머니가 주변 소개를 받아 권했던 일이었습니다. 준혁 씨 역시 향후 에어컨 설치 산업의 전망을 고려해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출근한 지 이틀째 되는 날, 건강했던 준혁 씨가 갑자기 쓰러진 겁니다. 출근 첫날, 준혁 씨는 친구에게 "땀을 2L는 흘린 것 같다", "죽을 것 같다"는 카톡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옷 속의 담배가 땀으로 다 젖어 종이처럼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출근 이틀째, 준혁 씨는 담배가 젖지 않도록 미리 비닐에 싸가기도 했습니다.

준혁 씨는 사측에 '냉각 모자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업계 동료들로부터 다른 사업장에서는 체온을 식혀주는 '쿨링 모자'를 쓰는 곳이 있다는 걸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측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고) 전날 준혁이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작업장에서) 물을 못 마시게 했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왜 물을 못 마시게 했냐' 물었더니, (사측이) '너무 많이 (물을) 마시면 탈수 현상이 오니까 물을 못 마시게 했다'고…. 그 말을 했었어요." 
- 고 양준혁 씨 어머니
 

'엄마보물♥' 아들이 하늘로... 책임 미루는 사람들

故 양준혁 씨 평소 모습 / 유족 제공

아들이 하늘로 간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어머니는 검은 상복을 벗지 못했습니다. 아들과 오순도순 둘이 살던 집 대신, 준혁 씨의 어머니는 광주고용노동청 앞에 마련된 아들의 분향소에서 매일 눈물을 쏟아야 했습니다. 하청업체와 원청사, 발주처인 전남교육청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삼성에어컨 설치 기사 20대 청년 노동자 폭염 사망사고 대책 회의'가 꾸려지고, 시민사회와 정치권 압박이 있은 다음에야 책임자들은 유족을 찾아와 고개를 숙였습니다. 준혁 씨가 일했던 유진테크시스템 대표이사가 분향소를 찾아 유족에게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고, 이 업체와 하청 계약을 맺은 삼성전자의 오치호 한국 총괄 부사장 역시 "이번 사고와 관련한 모든 조사에 임하겠다"며 "폭염 대비 대책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사건을 담당하는 박영민 노무사는 "신입사원이었던 양준혁 군이 입사 전후 '온열 질환'에 대한 사전 교육이나 안내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해당 하청업체에는 산업안전보건법상 위반 사항이 적발돼 과태료가 부과된 상태입니다.
 

사고 29일 만에 고개 숙이고... 길어진 여름 '온열질환' 급증

길어진 여름, 폭염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건강권은 해마다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지만, '온열질환'을 대하는 자세는 여전히 안일합니다.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최근 10년간 6월~8월 (여름철) 평균 기온은 24.2도로 평년(1991년~2020년) 대비 0.5도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00년대 평균 9.1일이었던 폭염일수 역시 올해에는 18.9일까지 늘어났습니다.

고용노동부 폭염 대비 가이드라인
 

강제성 없는 가이드라인... '폭염 사각지대' 곳곳에

정부도 폭염기 노동과 관련해 두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22년 산업안전보건기준에 대한 규칙이 개정되면서 '폭염 노출 장소'에서 작업하는 근로자에 대해 사업주가 적절한 휴식을 보장하는 등 의무가 법제화됐습니다. 이를 지키지 않은 사업주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형사 처벌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적절한 예방조치'인지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고용노동부는 '폭염 단계별 가이드라인'을 해마다 배포하고 있지만, 권고 사항에 그쳐 이것을 위반하더라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
 

'뇌가 익는' 열사병... 사업주 감수성에 맡겨진 노동자의 건강

이진아 노무사는 온열질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온열질환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단순히 위협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열사병의 경우, 제때 적절한 조치를 하지 못했을 때 치사율이 80%에 달하는 병입니다. '뇌가 익는다'는 표현까지 쓰는,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환입니다. 노동부는 해마다 여름이면 온열질환 대비 각종 지침과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지만, 사실상 그 강제성이 부재합니다. '사업주의 감수성이나 문제의식' 없이는 폭염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 그늘(바람), 휴식. 이 기본적인 원칙만 지켜져도 대부분의 온열질환은 예방할 수 있다는 걸 사실 사업주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업주는 '안전보건조치'를 제대로 이행하는 것을 비용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요. 기후위기로 해마다 늘고 있는 '폭염 산재'를 고려해, 국회에서는 '폭염시 작업중지권 보장'을 강화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기후 여건에 따라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에 위해를 끼칠 우려가 크다고 판단되면 작업 중지를 노동부 장관이 명령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입니다.

여기에 더해 노동자가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업중지권의 요건을 '급박한 산업재해 위험'에서 '기상 여건 등으로 인한 사망·부상 또는 질병이 발생할 위험'으로 확대하고, 위험 여부가 불확실할 때는 노동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한 법안(양준혁 법)도 발의됐습니다. 이 법에는 쓰러진 직원을 119 구급대 등에 지체 없이 신고하지 않으면 최고 3천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사진 찍을 시간에 119에 신고만 했어도 아들이 그렇게 고통당하고 죽지 않았을 텐데. 아직도 그 부분이 납득이 안 되어서 그게 제일 힘들어요." 고 양준혁 씨 어머니의 말입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열심히 일한 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온열질환에 대해 사후 처벌보다 '예방적인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행정 당국이 기존에는 '장소적 개념'으로 좁게 규정하던 위험을, 예전보다는 폭넓게 인정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예방과 관련된 조치가 '권고' 수준에 그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설명합니다. 단순히 '기상청 온도 지수에 따라 물, 그늘, 휴식 조치를 취한다'는 수준을 넘어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작업을 중지하거나 사업주가 선제적으로 작업을 중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미국 안전보건청

우리 몸은 고온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그에 대한 적응 반응이 일어나는데, 이걸 고온 순화라고 부릅니다. 이번에 숨진 양준혁 씨는 입사 이틀 된 신입사원이었습니다. 준혁 씨의 근무 시간은 첫째 날 오전 7시 45분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12시간이 넘었고, 둘째 날 역시 같은 시간 출근해 근무하다 오후 4시 40분쯤 쓰러졌습니다. 1년 전 이맘때 취재했던 "폭염 속 일하다 쓰러진 서른 살 청년" 역시 원래 했던 캐셔 업무에서 카트 이동 업무로 작업 환경이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졌습니다. 몸이 더위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 온열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겁니다. 
[ https://premium.sbs.co.kr/article/p9giQ_oaa4s ]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제희원 기자 jessy@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