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은 딴 세상…헤즈볼라 조직원들 아직도 삐삐 쓰는 이유는

유영규 기자 2024. 9. 19.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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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즈볼라 삐삐

이스라엘과 무력 분쟁 중인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조직원들이 지닌 무선호출기(삐삐) 수천 개가 동시 폭발하는 전례 없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레바논 보건당국은 17일(현지시간) 오후 3시 30분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선호출기가 폭발하면서 최소 9명이 숨지고 3천 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친 피해자에는 헤즈볼라 조직원 외에 모즈타바 아마니 주레바논 이란 대사 등도 포함됐고, 이웃 시리아에서도 최소 14명이 부상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레바논 안보 소식통은 헤즈볼라가 수입한 무선호출기 5천 개에 이스라엘 대외 정보기관 모사드가 폭발물을 심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의혹과 관련해 이스라엘군(IDF)은 답변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작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해 가자 전쟁이 발발한 이래 하마스의 편을 들어 이스라엘 북부 국경지대를 공격해 온 헤즈볼라는 조직원들에게 무선호출기 사용을 장려해 왔습니다.

휴대전화가 해킹돼 공격계획이 사전에 노출되거나 이스라엘의 표적공습에 주요 인사가 암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휴대전화의 카메라와 마이크는 스파이웨어를 심을 수만 있다면 원격 도·감청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위성항법장치(GPS)를 활용해 사용자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보안기업 NSO 그룹이 개발해 세계 각국에 수출한 휴대전화 도감청용 스파이웨어 '페가수스'는 민간인 불법 사찰 등에 광범위하게 악용돼 국제적 물의를 빚은 바 있습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헤즈볼라 최고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올해 2월 헤즈볼라 무장대원들에게 휴대전화를 쓰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일부 외신은 헤즈볼라가 전투지역에서의 휴대전화 사용을 아예 금지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무선호출기는 카메라와 마이크 등이 없어 도·감청 위험이 적고, 전파음영지역에선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도 휴대전화보다 덜한 까닭에 상당히 권장됐는데,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이를 역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미국과 서방국가 당국자들을 인용, 이스라엘이 이번 사건의 배후라고 전하면서 이스라엘 측이 헤즈볼라가 수입한 무선호출기에 소량의 폭발물을 심었다고 보도했습니다.

헤즈볼라가 타이완기업에 주문해 납품받은 무선호출기 배터리 옆에 1∼2온스(28∼56g)의 폭발물과 원격기폭장치가 달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무선호출기들에는 폭발 직전 신호음을 내 사용자가 호출기를 집어 들도록 만드는 프로그램도 삽입됐다고 NYT는 전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소셜미디어에는 무선호출기가 별다른 전조 없이 곧장 폭발하는 모습을 담긴 영상들이 공유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기기를 해킹해 리튬-이온 배터리를 과열시키는 등 방식으로 폭발을 유도했다면 폭발에 앞서 연기가 치솟거나 불이 붙어야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이스라엘 전직 당국자들도 파이낸셜타임스(FT)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무선호출기에 탑재되는 배터리는 너무 작아서 이번 사건에서처럼 심각한 부상을 초래하거나 사망자를 내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사이버보안기업 에라타 시큐리티의 로버트 그레이엄 최고경영자도 악성코드로 배터리를 터뜨릴 수는 있지만 영상에 잡힌 것처럼 강한 폭발을 일으킬 수는 없다면서 무선호출기가 레바논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누군가 폭발물을 심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해당 삐삐에는 타이완 업체 골드아폴로의 상표가 붙어있었지만 골드아폴로는 해당 기기들이 타이완이 아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제조됐다고 밝혔습니다.

현재로서는 공급사슬에 뚫린 뒤 유통 과정에서 해당 기기들에 폭발물이 설치됐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다만 WSJ에 따르면 한 헤즈볼라 당국자는 무선호출기가 갑자기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폭발 전 이를 버린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도 폭발물을 심은 전화기 등을 암살 수단으로 쓰는 모습을 보인 바 있습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계열 과격단체가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모사드는 프랑스 주재 PLO 대표 마흐무드 함샤리의 자택 전화기를 폭발물이 든 것으로 교체했고, 이를 모른 채 수화기를 집어든 함샤리는 중상을 입고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1996년에는 하마스의 폭발물 전문가 야히아 아이야시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베트가 폭발물을 심은 휴대전화를 쓰다가 폭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헤즈볼라의 무선호출기가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 이번 사건도 이스라엘의 소행이라면 12개월째 국경 너머에서 로켓과 미사일을 쏘아대는 헤즈볼라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최고위급 지휘관이 암살된데 대한 보복이라며 지난달 25일 이스라엘을 향해 320여 발의 로켓과 자폭 드론을 날려보냈는데 이에 대한 보복의 의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 사태를 두고 이스라엘의 또다른 국제법 위반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수천 대의 무선호출기를 터뜨리는 건 전례가 없는 공격 방식으로 분쟁과 관계없는 민간인까지도 해칠 수 있는 무차별성이 부각됩니다.

한때 IDF 법률고문이었던 히브리대학 소속 국제법 전문가 탈 밈란은 "무선호출기 공격은 새로운 유형의 공격이고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것"이라면서 "그 공격에 누가 다칠지,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부수적 피해로 간주될지 적절히 평가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유영규 기자 sbsnewmedi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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