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철들었다’ ‘효자’라지만…가족 돌봄에 갇혀, 사라진 내 꿈

허윤희 기자 2024. 9.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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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돌봄청년의 굴레 (상)
34살 이하 청소년·청년 10만여명
생계 어려움·정서적 고립에 방치
게티이미지뱅크
끊을 수 없는 ‘돌봄’이라는 굴레에 갇힌 이들이 있다. 질병, 장애 등을 가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만 14~34살의 청년이나 청소년들, 즉 ‘가족돌봄청년’이다. 보호받아야 할 나이에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이들은 ‘일찍 철들었다’ ‘효자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런 말조차 버겁고 부담스럽다. 정부와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돌봄 무게를 홀로 감당하는 이들에게 꿈을 꾸며 성장하는 시간은 없다. 정부는 가족돌봄청년을 전국적으로 10만여명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규모나 실태 파악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는 이 사회에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이들의 현실은 어떤지, 이들에게 필요한 돌봄은 무엇인지를 2회에 걸쳐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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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보이지 않았어요. (돈을 벌려고) 몇 년 원양어선을 탈까 생각도 했어요.”

대학 1학년 스무살 이종민(가명)씨는 가장이다. 공황장애와 뇌전증이 있는 어머니와 18살,15살, 12살 동생 셋을 돌보고 있다. 아버지가 있지만 생계를 등한시하는 탓에17살 때부터 가족의 실질적 가장은 종민씨다. 추석 연휴에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남들은 방학이나 연휴 때 어디 놀러 가잖아요. 또래 애들은 어디 놀러 갔다 왔다, 뭐 맛있는 거 먹었다고 인스타에 올리는데, 그걸 보면 박탈감이 느껴지곤 해요. 그래도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가족여행을 갔어요. 너무 오래돼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때 놀러 간 게 우리 식구 다 같이 간 마지막 여행이었네요.”

종민씨는 올해 입학 1학기 만에 휴학계를 냈다. 어떻게든 학업을 이어가보려고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올해 초 학교에서 한 심리검사에서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 번아웃이 올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평일엔 수업이 끝나고 식당에서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 심야 시간엔 편의점에서 2~3시간 일하던 터였다. 주말에도 그는 4~8시간 동안 식당에서 일했다. 그렇게 번 돈은 한달에 적으면 100만원, 많으면 200만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대학의 낭만도, 친구를 사귈 틈도 없이 바쁘게 살던 그의 선택은 결국 휴학이었다. “아파도 일을 해야 하니까 학업과 병행하기 쉽지 않더라고요. 밤새 편의점 알바를 한 뒤 곧장 학교에 가면 졸려서 수업을 들을 수 없었어요.”

휴학을 하고 식당 알바 등으로 지난달 번 돈은 140만원. 2주 동안 가족 식비로만 벌써 15만원이 나갔다.택시 운전을 하는 아버지는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다. 게다가 아버지는 대부업체에 대출 이자를 내야 할 때가 되면 종민씨에게 손을 벌렸다. “아버지가 가족이니까 도와야 한다면서 (돈을) 안 보태면 뭐라고 해요. 알바해 번 돈을 아버지 빚 갚는 데 쓰기도 했어요. 벌어도 매달 마이너스죠.”

생계뿐만 아니라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것도 그의 몫이다. 공황장애와 뇌전증을 있는 엄마는 수시로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종민씨가 고등학생 때부터 그랬다.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병원에 입원할 때 종민씨가 늘 함께한다. 요즘에는 사춘기 동생들의 학교폭력 문제로 학교에 가야 하는 일도 잦다. 종민씨는 몸이 5개면 좋겠다.

가족돌봄청년 10만명…경제 어려움, 정서적 고립

장남, 형, 보호자, 가장…. 그에게 책임을 지우는 수식어가 종민씨는 버겁다. 그냥 ‘이종민’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교사가 되고 싶어 국어교육과나 수학교육과를 가고 싶었는데, 졸업 뒤 취업이 잘된다고 해서 간호학과를 선택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가족이 경제 활동의 기틀을 잡아주는데 저는 그런 게 없잖아요. 저도 제 꿈을 위해 시간을 쏟아붓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에요.” 종민씨가 한숨을 깊게 쉬며 말했다.

종민씨처럼 질병, 장애 등을 가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만 14~34살 청소년 또는 청년을 ‘가족돌봄청년’이라 부른다. 보호받아야 할 나이에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이들은 복지 사각지대에 방치된 경우가 많다.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사회와의 관계 단절, 정서적으로 고립된 상태에 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가족돌봄청년 대상 시범사업을 진행해, 돌봄·가사·심리지원·식사·교육 등의 ‘일상 돌봄 서비스 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전국의 가족돌봄청년을 10만여명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기아타이거즈 팬인 박미주씨의 책상에 야구선수 사진과 야구공이 놓여 있다. 박미주 제공

가족돌봄청년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청년보다 삶의 만족도가 2배 이상 낮다. 복지부가 2022년 처음 실시한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4만3832명 대상)를 보면, ‘삶에 불만족한다’고 응답한 가족돌봄청년은 22.2%로, 일반청년(10.0%)의 2배 이상이었다. 우울감 유병률은 약 61.5%로 일반청년(8.5%)의 7배 이상이었다.

종민씨처럼 가족을 챙겨야 하는 박미주(가명·18)씨도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심하게 앓았다. 미주씨는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 15살 남동생과 살며 갈비집 홀 서빙,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번다. 최근엔 발목이 안 좋아 카페 일만 하고 있다.

미주씨는 초등학생 때 아버지의 빚 때문에 6년간 모텔을 돌며 지냈다. “월세를 못 내 가스와 전기가 끊겨서 찬물로 씻거나 버너에 라면을 끓여 먹었어요. 엄마는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고 걱정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력감을 느꼈어요. 그땐 나가서 일을 할 수 없으니 내가 집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모의 제대로 된 돌봄도 받지 못했다. 학교폭력을 당해 학교를 가지 않는 동생을 설득하고 밥을 차려주는 것도 그였다. “친구들이랑 놀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저녁 늦게 놀 수도 없고 오후 5시까진 집에 들어가야 했어요. 아빠가 저보고 남동생 밥을 챙겨주라고 했거든요.”

누적된 스트레스 탓이었을까. 혼자 삭여 버릇한 화병이 터진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그는 어느 날인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자해를 했다. 생각이 많은 날은 쉽게 잠들지 못해 사흘 동안 잠을 못 잔 적도 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의 웃는 소리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들렸고, 친구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면 뒷담화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도저히 학교에 다닐 수 없어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하고 대안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우울증 상담을 받았다.

미주씨는 힘들 때 자신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다. 기아타이거즈 팬인 그는 알바해 번 돈을 모아 좋아하는 선수가 나온 잡지, 사진 등을 샀다. 방 책상에 놓은 그 물건들을 볼 때마다 행복하단다. “알바해 번 돈이 들어오면 바로 집 생활비로 나가지만, 조금씩이라도 모아둬요. 안 그러면 돈 벌어도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돈이 없어요.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한테 사고 싶은 거 말하고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 내가 나를 위해 이렇게 해주지 않으면 받는 게 없어요. 나라도 나를 위해 무언가 해줘야죠. 아주 가끔요.”

“대학 입시 스트레스 받는 친구들 부러워요”

자신보다 가족을 돌봐야 하는 탓에 미주씨 같은 청년들은 미래를 준비하는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복지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미래 계획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약 36.7%로 나타났다. 중학교 때 춤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미주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댄스) 원데이 클래스에도 가고 싶지만 시간도 없고 비용도 부담이에요. 춤을 추고 싶을 땐 예전 영상을 봐요. 나도 이렇게 (춤을) 췄었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씁쓸해져요. 다른 친구들은 댄스 크루 공연을 다니기도 하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도 해요. 친구들은 힘들다고 하지만 저는 부러워요. 돈을 벌지 않아도 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잖아요.”

미주씨는 춤 동아리에서 활동할 때 입었던 공연복을 가장 아낀다. 서랍 속에 넣어둔 벨트가 있는 치마에 상의는 크롭 민소매와 후드 볼레로. 언제 다시 입을 수 있을까 싶지만 이사할 때마다 꼭 챙긴다. “언젠가 저도 제 꿈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긴 올까요.”

가족돌봄청년 생계와 의료·주거비 지원 첫손 꼽아

가족돌봄청년에게 필요한 복지서비스는 생계와 의료·주거비 지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가 지난해 만 14~34살 가족돌봄청년 9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은 돌봄으로 인한 어려움으로 경제적 문제(3.36점)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문화·여가 참여 기회 부족(3.32점), 정신적 건강 문제의 어려움(3.30점), 주거비 부담(3.30점), 돌봄 자체의 어려움(3.26점) 등이 있다고 응답했다. 응답자는 일반 성인(616명, 68.4%)이 가장 많았고, 대학생 108명(12%), 10대 청소년은 중·고등학생 146명(16.2%), 학교 밖 청소년 30명(3.3%)이었다. 응답자 중 여성은 66%(598명), 남성은 34%(302명)였다.

가족 중 돌봄 대상자는 할머니(28.2%, 229명), 아버지(26.1%, 212명), 어머니(25.5%, 207명) 차례로 높게 나타났고, 돌봄 대상자가 여러명인 경우도 있었다. 응답자들의 개인 소득은 100만원 미만이 45%(409명)로 가장 많았다.

보건복지부가 2022년 실시한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4만3832명 대상)를 보면 가족돌봄청년은 ​필요한 복지서비스로 생계 지원(75.6%), 의료 지원(74.0%), 휴식 지원(71.4%), 문화·여가(69.9%)를 꼽았다.

이수영 서울시복지재단 연구위원은 “병원비 등 돌봄 비용이 나가는데다 돌봄으로 경제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은 디폴트(기본값)”라며 “돌봄이 끝나더라도 경제적 기반이 없거나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는 경우에는 고립의 문제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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