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 테러’ 하루 뒤 무전기도 잇따라 폭발...이틀새 30여명 사망, 4000명 부상

김나영 기자 2024. 9. 19.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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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레바논 남부 항구 도시 시돈에서 민방위 응급 구조대원들이 휴대용 호출기가 폭발해 부상을 입은 한 남성을 태우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해온 이슬람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근거지 레바논에서 이틀 연속으로 불특정다수를 겨냥한 원격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 17일 레바논 전역에서 무선호출기(삐삐)가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해 최소 열 두 명이 숨지고 4000여 명이 부상했다. 다음날인 18일에도 수도 베이루트 등 여러 지역에서 무전기 등 무선기기 폭발이 잇따르면서 최소 스무 명이 숨지고 수백여 명이 다쳤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폭발한 무선호출기는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해 온 친이란계 이슬람 무장 단체 헤즈볼라가 올해 초 대원들에게 지급하려고 일괄 구입한 제품이었다. 뉴욕타임스(NYT)·CNN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은 당국자들을 인용해 헤즈볼라와 강도 높게 무력 충돌해 온 이스라엘이 배후로 지목됐다고 보도했다. 무장 대원뿐 아니라 다수의 민간인 사망·부상자도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스라엘이 사실상 국가 차원에서 테러 행위를 벌인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로이터와 이스라엘 일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에 따르면 17일 오후 3시 30분쯤부터 1시간가량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티레, 북동부 헤르멜 등 전국 각지에서 호출기 수백대가 폭발했다. 이 폭발로 최소 열 두 명이 숨지고 4000명 넘게 다쳤다고 레바논 보건 당국은 밝혔다. 그러나 부상자 가운데 200여 명이 중태라 사망자는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공습과 테러가 빈발하는 중동에서 특정 인물을 겨냥한 원격 공격이 일어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 통신기기를 폭발물로 활용한 경우는 전례가 없다. 헤즈볼라는 단순 군사 조직이 아니라 제도권 정당이다. 이 때문에 대원들과 가까이 있던 민간인들도 상당한 피해를 봤다고 알려졌다. 헤즈볼라는 희생자 중에는 열 살 여자아이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AP924′라는 모델명을 가진 이날 폭발한 무선호출기. /X(옛 트위터)

17일 폭발한 무선호출기는 ‘AP924′라는 모델명을 가진 단일 기종이다. 제조사는 대만의 골드 아폴로로 돼 있다. 그러나 골드 아폴로 측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제휴 업체에서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방식으로 우리 브랜드를 붙인 것이며 우리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했다. 이날 대부분의 폭발은 호출기에 특정 메시지가 수신되자 이를 확인하려고 화면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일어났다. 손·얼굴에 치명상을 입히도록 치밀하게 설계·실행된 것이다.

그래픽=김현국

이스라엘은 이번 폭발과 관련해 아무런 입장을 내지 않고 있으나, 이번 공격의 거의 확실한 주체로 지목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미 정보 당국을 인용해 이스라엘이 헤즈볼라가 주문한 호출기에 폭발 물질을 넣었다고 전했다. 헤즈볼라가 올 초 주문해 OEM으로 완성된 AP924 호출기 5000대가 레바논으로 향하기 전 이스라엘이 호출기마다 배터리에 소량의 폭약을 넣고 원격조종이 가능한 스위치 등을 삽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과정에서 조작이 이뤄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주문한 물품이 레바논에 도착해 배송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내부 스파이를 동원해 폭발 물질을 심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올해 2월 초 헤즈볼라를 이끄는 하산 나스랄라 사무총장이 대원들에게 이스라엘의 위치 추적과 도청을 따돌리기 위해 통신수단을 휴대전화에서 무선호출기로 바꾸라고 지시했다는 점도 이스라엘 개입의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적에게 전적인 책임을 묻는다”며 “반드시 정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부상자 중엔 모즈타바 아마니 레바논 주재 이란 대사도 포함됐으며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이번 공격은 제품을 생산하고 국가 간 물품을 주고받는 공급망이 대규모 인명 살상 루트로 활용됐다는 점에서도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유럽의 군사 전문가 엘리아 매그니에는 AFP에 “이스라엘 정보 당국이 제품 공급망을 뚫고 들어가 원격조종 폭발 장치를 심었다”며 “제품을 생산해 판매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 제3자가 공격에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친이란 무장 단체 요인들이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원격 사살돼 배후로 이스라엘이 지목되는 사례는 최근 드물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지난 7월 하마스의 최고 정치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란 테헤란에 머물 때 AI(인공지능)를 탑재한 첨단 원격조종 폭탄으로 사살됐다. 앞서 2020년에는 이란 핵 개발 총책으로 알려진 핵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가 테헤란 외곽에서 AI 로봇 기관총에 사살됐다. 이 로봇 기관총엔 카메라로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 누구인지 알아내고, ‘목표물’과 일치하면 1000㎞ 이상 떨어진 원격조종자에게 알리는 기능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타격을 입은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을 비난하면서도 당황한 모습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헤즈볼라 관계자는 로이터에 “이스라엘과 1년 가까이 계속돼 온 분쟁에서 가장 큰 보안 사고”라고 말했다. 이번 공격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의 전쟁 발발 1년을 앞두고, 하마스에 피랍된 이스라엘 인질 석방을 위한 휴전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는 상황에 나왔다. 하마스 격퇴전을 감행하고 있는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정권이 테러 비난을 감수하고 공격을 감행한 의도에 대한 관심도 집중되고 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네타냐후가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국내 분위기의 반전을 꾀하려고 공격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 전선을 넓혀 중동 정세 긴장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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