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학- 철학실종시대, 사라진 강원 동학사를 찾아서]15. 전북 정읍에서 타오른 혁명의 불꽃

김진형 2024. 9. 1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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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에 담은 결의…사람답게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다
조병갑 부정부패로 민심 들끓어
전봉준 등 20명 사발통문 작성
고부 관아 점령·무장포고문 발포
황토현 전투 승리·전주성 점거
청군 출병 소식에 전주화약 맺어
폐정개혁안 관철·집강소 설치
조정, 일본군에 침략 명분 제공
정읍 곳곳 동학 관련 기념물 넘쳐
표지판조차 미비한 강원과 대조

 

“동학은/현실 개조의 종교요./자기혁명, 국가혁명, 인류혁명,/(중략)/이왕/일어서려는 의지/굳게 하셨으면/하늘끝까지,/벽을 찢고/하늘끝까지” (신동엽 서사시 ‘금강’ 일부)

전북 정읍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 가장 활발한 지역으로 꼽힌다. 전국 최대 규모의 동학 국가사적지인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황토현 전승지 일대 30만 1329㎡를 새롭게 꾸며 지난 2022년 개원했으며 이곳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관련 자료를 꾸준히 수집, 보관하며 그 의미를 널리 알리고 있다. 관군과 민보군, 일본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던 동학농민군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끈질기게 살아남은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우리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이번 취재에서는 그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전북 정읍을 방문, 동학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까지 원인과 과정을 돌이켜본다.

▲ 고부관아가 있던 고부초등학교.

■조병갑의 폭정이 일으킨 나비효과, 혁명의 도화선으로

곡창지대였던 고부의 민심은 군수 조병갑의 부정부패로 폭발 직전이었다. 폭정으로 유발된 나비효과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그때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조병갑은 필요 없는 만석보를 세워 전례 없던 물세를 거뒀고, 온갖 명분과 트집으로 백성을 착취했다.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 또한 조병갑에게 항의하다 곤장을 맞고 죽었다.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라도 어디 남아있겠나”(‘사발통문’ 중)

1893년 음력 11월 전봉준, 김도삼, 송대화, 최경선, 손여옥 등 20명은 지역의 부호인 송두호의 집에서 전주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곧장 향하자는 결의를 담은 사발통문을 작성한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은 김도삼·정익서·최경선 등과 함께 봉기해 고부 관아를 점령한다. 동학농민군은 수탈에 앞장선 아전들을 처벌하는 한편,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고 만석보를 해체한 후 군량을 확보했다.

▲ 임영선 조각가가 만든 ‘불멸, 바람길’.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군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이 취임해 일시적인 화해분위기가 조성됐으나 장흥부사인 이용태가 안핵사로 취임하면서 다시 상황은 악화된다. 그는 민란의 우두머리를 잡아들인다는 명목으로 재물을 빼앗고 민가에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난을 만든 것이 조병갑이라면 난을 키운 것은 이용태였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바 근본이 깎이면 나라 역시 쇠잔해지는 법이다. (중략) 우리 동학농민군은 비록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앉아서 볼 수 없어 오늘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노니”(‘무장포고문’ 중)

전봉준은 전북 고창군 무장에서 대접주 손화중을 만나 봉기를 설득하고, 태인대접주 김개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들이 결의한 무장포고문이 3월 20일 발포되면서 사회 개혁 의지를 담은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호남창의소를 설치한 고부 백산에는 수만명의 동학군이 모여들었고, 관군에서는 홍계훈이 전라도병마절도사와 양호초토사로 임명돼 700명이 토벌군으로 출동한다.

▲ 김운성 조각가가 1994년 제작한 무명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

■전주성 점령… 최초의 지방자치기구 ‘집강소’ 설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동학의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은 폭력으로는 문제해결이 안된다고 전봉준에게 경고하고 각 접에 통유문을 발송했지만 절박했던 호남의 상황은 이미 수습하기 어려웠다. 동학농민군은 4월 7일 관군과 보부상 1000여명과 맞선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어 장성 황룡강에서는 대나무를 엮어 총알을 막는 ‘장태’를 활용, 경군 300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4월 27일 동학농민군 2만명은 전주성에 무혈입성 한다.

조선 왕가의 상징적인 장소를 점거했다는 소식은 조정에 큰 충격을 줬다. 홍계훈은 청국의 출병을 조정에 요청했고, 이를 승인한 조선의 선택은 침략의 명분을 만들고자 했던 일본에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다.

▲ 강원도를 포함해 농민군이 봉기한 전국 90개 지역을 상징화시킨 ‘울림의 기둥’

청군의 출병 소식에 전주성의 동학군은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맺는 것으로 해산을 결정한다. 더불어 폐정개혁안을 관철시킨다. 탐관오리의 조사와 징벌, 노비문서 불태우기, 젊은 과부의 재가 허용, 토지 균작 등 봉건적 신분 질서의 모순을 부수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6월 6일에는 집강소 설치가 승인되면서 백성에 의한 ‘자생적 근대’ 최초의 지방자치제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유림 등 기득권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고 동학 강경파인 김개남이 활동했던 남원에서는 폭력적인 상황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다.

이 시기 ‘천우협’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낭인들은 첩보활동을 펼치며 동학군의 봉기를 부추겼다. 전봉준을 만나 친일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도 전했으나, 전봉준은 “자신들의 힘으로 문제를 풀겠다”며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한다. 임진왜란 이후 300년 만의 치욕인 사건이자 주권 침탈이었다. 일본 기록인 ‘일청전사’에는 조선군의 발포로 인한 우발적 사건으로 공식 발표됐으나, 후쿠시마 현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초안을 살펴보면 명백한 계획 범죄였으며 국제사회의 비난을 의식한 은폐 시도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당시 한성점령을 지휘했던 인물은 아베 신조 전 일본총리의 고조부인 오오시마 요시마사였다. 이들이 조선 사회에 던진 충격은 청일전쟁의 시작과 최시형의 동학농민군 총기포령, 그리고 우금치의 비극을 예고했다.

▲ 전북 정읍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관람하는 시민들.

■가는 곳마다 기억… 강원도와 대조적

정읍은 발길 닿는 곳마다 동학 관련 기념물로 넘쳐났다. 마을마다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특히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는 황토현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63년 건립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조형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활동했던 당시 그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이전까지 사용되던 ‘동학란’이라는 표현대신 ‘혁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해 동학에 대한 인식 제고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기인 1970년부터 1979년판 국사교과서에는 기존의 ‘동학란’ 대신 ‘동학혁명’, ‘동학혁명운동’ 등의 표현이 쓰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친 박성빈은 경북 성주지역의 동학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탑을 내려오니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지도자와 농민군의 위패가 보관된 구민사가 보였다.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떨쳐 일어났던 선조들의 희생을 후손들이 잊지 않겠다는 듯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임영선 조각가가 만든 ‘불멸, 바람길’ 조형물도 인상적이었다. 전봉준을 선두로 뒤를 잇는 동학농민군의 모습을 사람 인(人)자로 형상화 시켰으며 그 크기와 위상이 남달랐다. 강원도를 포함해 농민군이 봉기한 전국 90개 지역을 상징화시킨 ‘울림의 기둥’도 눈길을 끌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내부에는 동학농민군이 모였던 말목장터의 감나무가 있었으며 전봉준 판결문, 첩보 문서, 무기, 일청전쟁실기 등 다양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빠져나와 고부면에 도착하자 사발통문의 결의를 기념하는 동학혁명 모의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인근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의 동학농민혁명군을 기리는 위령탑도 세워져 있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주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으며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춘천 출신 김운성 조각가가 제작했다.

비록 유해가 없어도 전봉준의 묘를 만들어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는 점도 새삼 놀라웠다. 지역민들의 자부심 또한 그만큼 컸다. 기념관은 커녕 표지판과 비석조차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강원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특히 고부관아가 있었던 고부초등학교를 전북도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수의 강원동학군이 효수된 장소인 강릉해람중의 사례가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있는 역사조차 제대로 찾아 알리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후대에 대한 과오는 아닐까.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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