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실에 놓인 위스키의 비밀… 나가하마 증류소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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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장실에 위스키가 한가득 쌓여 있습니다. 이따금 해가 드는 긴 복도부터 교실 내부까지 발이 닿는 곳마다 위스키뿐. 가장 귀하고 비싼 위스키는 교장실에 자리했습니다. 교무실이나 학급, 층수별로 그 종류도 천차만별. 심지어 음악 교실에 놓인 위스키에는 모차르트 음악이 흐르는 청진기까지 붙어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웬 술타령이냐 싶겠지만 이곳은 일본 내 가장 작은 증류소인 ‘나가하마’의 숙성창고입니다. 폐교가 새로운 지역 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죠.
일본 교토역에서 열차로 약 한 시간가량 떨어진 나가하마 증류소. 먼발치에 증류소의 로고인 이부치 산도 보입니다. 시가현, 나가하마시에 있는 증류소는 에도시대 쌀 창고를 개조한 건물입니다. 그래서인지 건물 형태도 직선이 주를 이루고 지붕은 마치 쇼군의 투구를 연상케 합니다. 1996년에 설립돼, 맥주 양조사업을 해오던 증류소는 2016년부터 위스키까지 병행해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맥주를 증류하면 위스키가 되는 셈이니 증류기만 새로 들이면 됐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해 11월, 나가하마 증류소의 첫 스피릿이 증류됩니다.
◇한 번의 양조로 하나의 오크통을 채운다.
증류소에 들어서면 숙성을 제외한 위스키의 모든 공정 과정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8평 남짓한 공간에서 당화, 발효, 증류까지 이뤄지는 셈이죠. 1층에서는 당화와 증류, 2층에서는 발효가 진행됩니다. 눈에 띄는 것은 포르투갈 ‘호가’사에서 제작한 3개의 아담하고 작은 알렘빅 증류기. 마치 과거 밀주를 생산할 법하게 생긴 작은 증류기의 용량은 1000리터. 연간 수천만 리터를 뽑아내는 대형 증류소와 달리 이들이 한 해 뽑아낼 수 있는 증류액은 약 8만 리터. 그마저도 365일 하루 1회 이상 돌려야 이만큼의 양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조롱박 형태의 증류기는 증류액과 구리와의 접촉 면적이 넓어 비교적 부드럽고 깔끔한 형태의 스피릿을 추출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맛을 보니 곡물의 단맛이 두드러진 꿀 느낌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가하마는 총 6개의 워시백(Washbag: 발효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워시백 하나당 용량은 2000리터. 각 워시(Wash: 발효액)에서 2차 증류 후 나올 수 있는 스피릿의 양은 약 260리터. 어림잡아 혹스헤드 크기의 오크통에 들어갈 수 있는 용량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나가하마 증류소의 슬로건인 ‘일양일준(一醸一樽)’. 한 번의 양조로 하나의 오크통을 채운다.
◇폐교와 폐터널을 활용한 숙성창고
나가하마는 내륙성 기후로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인 비와호의 영향을 받아 여름이 뜨겁고 습합니다. 또 겨울철에는 폭설로 교통이 마비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고 합니다. 여름 평균 기온은 25~30도 사이. 겨울철에는 -5까지 떨어집니다. 지난 7월, 증류소를 방문했을 때 내리쬐는 뙤약볕은 양산 없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물리적으로 몸에 있는 수분이 마르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숙성 방식은 폐터널과 폐교가 된 2층짜리 초등학교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연간 5%에 육박하는 위스키의 증발량을 조절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 셈입니다.
두 숙성고는 증류소에서 차로 약 20분가량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길이 300미터의 터널은 연중 10~15도를 유지하며 습도 높은 환경을 제공합니다. 보통 온도 변화가 적을수록 위스키의 숙성도 균일하게 이루어집니다. 스피릿이 오크통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가하마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오크통이 터널에서 숙성을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이곳에서 나가하마 특유의 과일 풍미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오크통이 초등학교 건물로 옮겨집니다. 창문이 많아 직사광선에 노출된 초등학교는 외부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겨울철 -5도에서 여름에는 36도까지, 본격적인 실험과 빠른 숙성이 이루어지는 곳이죠.
학교에 들어서면 짙은 나무 향이 코를 반깁니다. 이제는 학생들이 떠난 지 4년이 돼가지만, 내부는 크게 바뀐 게 없는 듯합니다. 교장실부터 각 학급 교실, 칠판, 사물함까지. 웃고 떠들어야 할 학생들 대신 과묵한 오크통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죠. 교실 칠판에는 선생님의 손글씨 대신 오크통의 종류와 숙성 기간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1층은 2층이 비해 기온이 낮습니다. 창문도 커튼으로 대부분 닫혀 있는 상황. 미즈나라 오크통을 비롯한 고급 셰리 오크통은 1층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숙성 기간을 길게 보는 제품들이죠. 2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빠른 숙성을 강요하는듯한 후끈한 열기. 온도계 없이도 공기가 다름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2층은 각종 와인 오크통, 벚꽃 나무 등을 활용한 실험적인 오크통을 배치해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학교 내 실험실에서는 각종 블렌딩이 이루어졌고 음악실 오크통에는 청진기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현장을 안내해 주던 헤드 디스틸러 이하라 유야는 다양하고 신선한 오크통이 가진 특징을 잘 살리는 게 증류소의 장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신생 증류소의 생존전략
일양일준이라는 슬로건이 보여주듯 나가하마에서 출시되는 싱글몰트 제품들은 500밀리입니다. 생산량이 적다 보니 700밀리 병으로 출시하기에는 원액이 넉넉지 않겠지요. 맛있다고 소문도 나기 전에 제품들이 동나기가 일쑤. 그래서 이들이 차선책으로 출시한 제품군이 ‘아마하간(Amahagan)’ 시리즈입니다. 나가하마의 알파벳을 거꾸로 나열하면 아마하간. 아마하간은 평소 부족한 위스키 원액을 수입해 본인들의 위스키와 블렌딩한 제품입니다. 특히 유명 뮤지션, 애니메이션 등과 콜라보를 해 독특한 라벨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하라 유야는 위스키 애호가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사람들까지 위스키에 관심을 두게 하려는 게 협업의 목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양한 오크통 수급
나가하마의 모회사는 일본의 거대 주류 기업인 리커 마운틴입니다. 여러 수입사와 인맥으로 양질의 오크통을 구매하는 유통로죠. 실제로 이하라 유야는 보르도 와인 오크통을 사용한 제품을 계기로 해외 위스키 수출이 활발해졌다고 합니다. 또 다양한 오크통의 개성을 최대한 살려서 팬층을 늘려나가는 게 현재 목표라고 설명했습니다. 유야는 와인 오크통에 대해 “단순히 달고 프루티하기는 쉽지만, 타닌감을 잡는 게 어렵습니다.” 빠른 숙성은 자칫 타닌감을 극대화 시킬 수 있어 터널 숙성의 필연성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이날 시음한 제품은 총 4가지. 소테른, 사쿠라, 보르도 레드와인 그리고 아일라 오크통에서 숙성한 제품입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제 막 3년을 넘긴 숙성 연수가 짧은 제품들임에도 오크통의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는 점입니다. 소테른의 달콤함, 사쿠라의 벚꽃 풍미 등이 스피릿과 매끄럽게 어우러져 직관적인 ‘통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칫 와인 오크통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시큼하거나 산패된듯한 맛도 없이 깔끔했습니다. 숙성 연수가 올라가면 어떻게 변할지 더욱 기대됐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작은 증류소가 여러 국제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수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증류소 견학뿐만 아니라 1박 2일 증류 체험도 연간 계획이 꽉 찬 상태죠. 거대 스카치 증류소에서 경험할 수 없는, 정말 손수 만든 크래프트 증류소만의 매력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나가하마 증류소는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곳입니다. 논 피트뿐만 아니라 피트도 기분 좋게 잘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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