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오늘]있고도 없는 ‘희망’

기자 2024. 9. 18.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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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듯 보였던) 추석 연휴가 속절없이 끝났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유례없는 폭염 속에서도 함께 살아온 어제와 오늘, 함께 살아갈 내일을 이야기하며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달뜬 기분으로 어제는 추억했으되, 마음 놓고 오늘과 내일은 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누군가’가 특정 세대는 아니다. 노년, 장년, 중년, 청년, 유소년 세대 모두, 즉 우리 시대 대다수 사람들은 무언가에 쫓기며 오늘을 살고, 하여 내일을 기대하지 못한다. 팍팍한 경제 현실 때문만은 아니다. 각각의 인생은 저마다의 고민이 있고, 그 고민 속에서 희망이 영글어야 하는데, 희망이 사라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 디디와 고고는 ‘고도’(Godot)라는 이름의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던 두 사람은 시답잖은 대화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그 대화의 끝이 묘하다. 디디가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말하면 고고는 늘 “참 그래야지”라고 화답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온다면 어디로 오는지도 모르는, 심지어 고도의 정체조차 모르는 두 사람은 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두 사람의 오랜 기다림 끝에 고도의 소식을 전하는 심부름꾼 소년이 등장하지만, 그의 말은 “고도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라는 게 전부였다. 혼돈의 연속일 뿐, 고도는 끝내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디디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디디와 고고가 ‘고도’라는 이름의 희망을 기다렸다면, 독일 작가 프리츠 오르트만의 단편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주인공 남자는 희망을 찾아 나선 사람이다. 그렇다고 남자가 희망의 실체를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멀고도 멋진 도시”에 대한 말만 전해 들었을 뿐,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남자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곰스크로 가는 것이었다. 결혼과 함께 곰스크행 기차에 올랐다. 남자의 꿈은 반쯤 이뤄지는 듯했지만 아내는 달랐다. “우린 모든 것에서 멀어져 가는군요”라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대신했다. 잠시 정차한 간이역에서 두 사람의 인생은 돌변한다.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간이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고 읍내 구경에 나선 두 사람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남자는 노심초사했고, 아내의 발걸음은 용수철처럼 튀었다. 출발을 알리는 기적이 울렸을 때, 남자는 기차를 향해 내달리려 했지만 아내가 늦었다며 팔을 잡았다. 이후 남자는 기차가 들어올 때마다 기차역을 향해 뛰었고, 두 사람은 그때마다 옥신각신했다. 새 생명의 탄생과 함께 두 사람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남자가 곰스크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곰스크로 가는 특급열차가 저 멀리 돌진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곰스크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었다.

루쉰은 희망이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어지는 말을 보면 뜻은 선명해진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는 어쩌면 먼저 길을 걸어간 사람일 수도 있겠다. 곰스크에 가고자 분투한 남자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희망을 부여잡고 사는 일, 그것만이 우리네 인생의 숙명 아닐까, 추석 명절 끝자락에 생각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장동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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