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한가위에 해리스와 김민기를 떠올리다

이홍규 동서대 캠퍼스아시아학과 교수 2024. 9. 1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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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된 우리 어머니들 삶
죄스럽고 무척 슬프지만 그 고귀한 희생과 헌신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
이홍규 동서대 캠퍼스아시아학과 교수·중국연구센터 소장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날로 쇠약해지시는 모습이 가슴 아프면서도 한가위 명절을 어머니와 함께 보낼 수 있음이 감사한 날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설이나 한가위 명절이 기다려지곤 했다. 평상시 잘 먹을 수 없던 달고 기름진 음식들을 다 먹을 수 있는 기쁨도 있었지만, 큰집인 우리 집에는 많은 친척이 찾아와 시끌벅적한 잔칫집 분위기가 물씬 났기 때문이다.

큰집의 맏며느리로 명절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맞이로 며칠 동안 중노동을 하시고 남은 음식을 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내게 보이기 시작한 건 사춘기를 한참 지나서였다. 그 때문인지 명절에 대한 감흥도 심드렁해졌고 친척 방문도 그리 반갑지 않게 됐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명절 음식 준비와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으셨는데, 그 일들을 맏며느리인 자신이 뒤에서 조용하게 수행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자 의무라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요즘 시대의 화두인 페미니즘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의 모습은 가부장적 규범에 순종해 온 여성이다. 어머니는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인 구조 내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딸을 규율하고 억압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거부해 온 딸들이 이제 며느리가 돼 시댁의 불평등한 젠더 규범에 저항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우리 세대의 남성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 세대의 가부장적 태도를 그대로 배워 따라 하거나 어머니나 아내가 겪는 불평등한 가족 문화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답습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나는 다소 엉뚱하게도 해리스와 김민기가 떠올랐다. 갑자기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카멀라 해리스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가수 겸 공연기획자 김민기 말이다.

해리스가 떠오른 건 그녀가 이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된 여성이란 점 때문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미국 최초의 아시아계 흑인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상황이다. 그녀는 로스쿨을 나와 검사와 상원의원을 거쳐 2020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사퇴하고 미 대통령에 당선된 조 바이든의 러닝메이트로 그동안 부통령으로 활약해 왔다. 그러다 재선에 도전했던 바이든 대통령이 건강 문제로 낙마하자 일약 2024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등장해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토론에서 승기를 잡는 등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됐다. 그녀는 여성이자 아시아계 흑인이란 점에서 미국 사회의 소수자 입장이지만 이민자의 국가 미국에서 여성과 다양한 소수자들이 결집한다면 그녀의 당선도 실현 가능한 상황이 될 것이다.

해리스의 삶은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만 해온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과 너무나 대비된다. 만약 어머니가 1930년대 후반 식민지 한반도에서가 아니라 해리스처럼 1960년대 세계 최강국이자 자유주의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아니 최소한 1960년대 한국에서만 태어났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무슨 책이든 다 좋아하시던 그 기질로 보면, 대학자가 되셨을 수도 있고 항상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고 솔선수범하는 태도로 보면 큰 지도자가 되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가 태어난 시대가 여성을 속박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상이었다면, 어머니는 해리스처럼, 아니 최소한 우리들처럼 자유로운 청춘을 경험하며 온전히 자기 삶에 집중해 특별하고 개성 있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가족이란 공동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희생한 삶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나는 어머니들의 삶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뒷것’ 김민기의 삶과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명문고와 명문대를 나온 사람, 한국 최고의 포크 음악 싱어송라이터라 불리운 사람, 그의 곡 ‘아침 이슬’로 민주화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 소극장 ‘학전’을 만들고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연출해 흥행 대박을 터뜨린 공연 기획자 등 그는 화려한 경력과 업적으로 오래전부터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 성과만으로도 그는 적지 않은 부를 쌓았을 것이고 유명세를 잘 활용했다면 권세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 힘없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만들었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극장을 만들어 그들의 성공을 이끌었지만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뒷것’의 삶을 지향했다. 그는 미래 세대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에 극단 재정은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결국 죽음에 이른 사람이다.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 그가 남겼다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머니를 생각했다.


한가위에 어머니를 뵈면서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 ‘뒷것’이 돼 수많은 ‘앞것’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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