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풍년이 서러운 농심

오창민 기자 2024. 9. 1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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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마다 곡식 익는 소리가 들린다. 풍부한 일조량과 고온 덕에 벼 이삭이 유달리 더 통통해 보인다. 태풍이 막판 변수지만 이변이 없는 한 대풍이 예상된다. 사과와 배도 올해는 작황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농민들 얼굴엔 수심만 가득하다. 자식처럼 키운 벼를 트랙터로 갈아엎는 사례가 속출한다. 추석을 겨냥해 재배한 조생종 벼 가격이 지난해보다 20% 가까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음달 중·만생종이 쏟아지면 쌀값은 더 떨어질 것이다. 역대 최대 폭락을 기록한 2022년보다 더 낮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부가 지난 10일 쌀값 안정대책을 발표했다. 햅쌀 10만t을 시장에서 격리해 사료로 쓰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가축에게 햅쌀을 먹이다니, 전대미문의 정책이다. 오죽하면 이런 정책까지 낼까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동물도 양질의 사료를 먹어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 생각은 없지만 쌀 한 톨이 귀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시골 농협 창고마다 가득 쌓여 있는 묵은쌀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쌀이 남아도는데도 국내 생산량의 10%가 넘는 40여만t을 매년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있으니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공산품 수출 국가들이 최소시장접근(MMA) 물량만큼 농산물을 수입하기로 한 결과다.

일을 많이 해도 농민들은 가난하다. 풍년엔 가격 폭락으로 손해를 보고, 흉년엔 농산물 수입으로 직격탄을 맞는다. 대파 가격만 올라도 죄인 된 심정이다. 물가가 그렇게 많이 올랐지만 마트의 쌀값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20㎏에 5만원 안팎이다. 커피 1잔 가격이면 공깃밥 5그릇을 먹을 수 있다.

농업은 시민의 생명 유지와 식량 안보에 필수적인 국가 산업이다. 환경 보호와 지역사회 유지 등 돈으로 가치를 환산하기 어려운 역할도 수행한다. 시장 논리로만 접근하면 한국 농업은 존립할 수 없다. 쌀 농정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저렴한 쌀값 덕에 도시인들이 풍요롭게 살고, 국내 쌀 시장 개방으로 외국의 반도체와 자동차 시장을 열 수 있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농민들에게 지급해야 공정한 것 아닌가. 풍년에 피눈물 흘리는 농민이 더는 없어야 한다.

지난 9월12일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의 한 논에서 농민들이 쌀값 보장 등을 요구하며 논을 갈아엎고 있다. 연합뉴스

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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