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아의 도시스카프] "한가위만 같겠나?", 쉼이 있어야 진정한 추석
쉬기 위해 '공간사냥' 나서는 명절 유목민 물질적 성장보다 정신적 평온에 더 만족 연휴기간 '마음의 충전'은 제대로 했을까 책 한 권 나누며 사색하는 시간도 가져야
"며칠이나 다녀왔어? 어디 갔는데?" "호텔에서 책 몇 권 읽고 쉬다 왔지!"
30여 년 전,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단짝이었던 친구는 명절이면 늘 책 몇 권 들고 떠났다. 속으로는 "그 돈 들여 해외까지 가서 고작 책 몇 권 읽고 오다니…."했었다. 그 흔한 인증 사진 하나 없이, 다 읽은 책을 건네며 조잘대던 그녀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가족과 직장, 모든 심리적 중력이 전혀 없는 공간에서의 쉼은 산삼 같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공간사냥'을 나선다. '쉬기 위해'서다. 지자체들은 가을 시즌 브랜드로 '책 읽기 좋은 도시'를 출시한다. 찬 바람이 불어야 '독서의 계절'이 입에 붙는데 그러기엔 참! 뜨겁다. 추석(秋夕) 연휴 무더위가 전국을 달궜다. 폭염 특보가 내려졌고, '이젠 추석이 아니라 하석(夏夕)이 아니냐'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나온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날씨에 벌초를 하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였다. 이례적으로 열대야 현상까지 나타났다.
한가위라고 대문 앞에 차들이 몇 겹씩 주차되었다. 어르신들은 나름 집 앞에 차가 몇 대나 세워졌는지를 보고 부심(父心)을 느끼며 흐뭇해한다. 자녀들은 기다리는 부모님과 만날 형제들을 생각해 한 짐을 이고 지고 고향을 향해간다. 누군가는 손이 마를 새 없고 누군가는 허리가 휘도록 상을 차려낸다.
그래도 밤새 대화가 꽃피는 집은 그나마 낫지만, 전깃줄에 일렬로 앉은 참새마냥 TV 앞에 모여 있지만, 대화는 드문 경우도 많다. 도서관 메뚜기 하듯 차례를 지내고, 친인척, 본가, 처가 순회가 끝나면 며칠 간의 '연휴 행사'는 막을 내린다.
그래서일까? 연휴 끝 무렵 카페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다. 30평 남짓한 공간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수십 명이 복닥거리니 궁둥이 붙일 곳이 마땅치 않다. 그렇게 며칠간의 유목 생활을 마치고, '내 자리'가 있는 쉴 곳으로 왔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오죽하면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명절을 피해 일부러 비상 근무를 지원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공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쉴 곳이 없는 것도 한몫한다. 심리적·물리적인 것 포함이다. 관계적인 측면에서도 직계가 아니면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지속된다.
명절의 사전적 정의는 해마다 기념하는 축일로 문화적·사회적 의미를 갖는 날이다. 가족 간의 만남과 연대가 핵심이지만, 노르딕 국가인 아이슬란드처럼 성탄절에 '책 홍수'(욜라보카플로드)로 사색과 쉼을 주는 전통도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을 주고받는데, 특히, 성탄 전에 책을 읽고 혼자 사색하거나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끼리 토론을 하며 정신적 충전을 한다. 아이슬란드와 배경은 다르지만 생각해볼 만 대목이다.
북카페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북카페는 서가를 잘 갖춘 카페라기보다는 '책 모양의 소품으로 인테리어'를 한 카페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북카페를 가면 책 한 권 읽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정신적 충전이 되는 것만 같다. 공간이 주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다.
행복 경제학의 선구자인 리처드 라이어드(Richard Layard)는 사람들은 물질적 성장보다 정신적 평온과 사색에서 만족을 더 느낀다고 말한다. 그래서 도서관을 두고도 카페를 찾고, 그것도 부족하니 24시 스터디카페를 이용한다. 경쟁 사회에서 자기계발에 대한 학습의 압박감을 카페의 자유롭고 평온한 분위기로 상쇄시키는 자기 치유법인지도 모른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별마당 도서관은 그야말로 명소다. 책을 사고 읽으러 오는 사람도 많지만, 관광객도 많다. 높은 층고와 서가, 군데군데 잘 마련된 앉을 공간, 넓은 홀의 개방감은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식처가 된다. 북파크와 같은 공간에서는 소정의 입장료를 지불하면 온종일 편한 의자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책 한 권이 마련해주는 심리적 공간과 쉼이다.
지자체가 표방하는 '책 읽기 좋은 도시'와 '책 읽는 사회'는 결이 다르다.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다. 아직도 도서관은 학습을 위한 경직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네덜란드의 틸뷔르흐 도서관처럼 공간 자체가 문화적 체험을 제공하고, 뉴욕의 브라이언파크처럼 자연과 도서관이 어우러진 공간은 그 자체로 정신적 충전소가 된다.
코로나19 이후로 워케이션(휴가지 원격근무)이 등장하면서 공간 자체를 빌리는 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자신이 가진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제3의 공간이 주어진다면, 그 자체로도 공간은 효용을 다하는 것이다.
명절 유목민들도 그러한 공간이 있다면 연휴 동안 고향에서 사색도 하고 정신적 충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 전기충전소, 졸음쉼터는 구간마다 있지만, '마음의 충전소'는 각자의 몫이다.
인구소멸 위기, 지방소멸 위기가 모든 지자체의 공통 현상이다. 총인구수는 정해져 있는데 서로 인구 유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결국은 한 덩어리인데 셈을 잘 해야 한다.
화려한 인프라가 문제가 아니다. 주어진 인프라를 혁신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혜안과 잘 다듬어진 정갈한 공간이면 된다. 시원한 나무 그늘과 맑은 공기, 그리고 편히 기대어 앉을 수 있는 의자면 족하다. 공공시설 어디를 가도 의자는 많은데 앉을만하지가 않다. 책은 많은데 편안하게 책을 읽을 곳이 없다.
'한가위만 같아라'는 참 아름다운 말인데 우리의 도시 공간은 '한가위만 같겠나'싶다. 그러나, 가구를 배치하듯 가진 것을 잘 다듬고 배치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음 명절에는 책 한 권 나누며 함께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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