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칼럼] 확증편향 정부의 벌거벗은 임금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권한은 있는데 책임은 없다’고,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 터다.
윤석열 대통령의 세번째 국정브리핑(8월29일)은 ‘확증편향 정부’에 대한 심리적 마지노선을 무너트렸다.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 직후 “한국 정부가 확증편향에 갇혀 있다”는 미국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의 비웃음에도 주저했지만, 이젠 그 사실을 선선히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경제·재정, 외교·안보, 사회개혁을 망라해 살뜰하게도 자화자찬하는데, 그 동떨어진 민심과의 거리는 대통령 말마따나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의료개혁 자찬만큼은 도를 넘었다. 의·정 갈등은 무엇 하나 해결된 게 없는데 “의대 증원이 마무리된 만큼” 개혁 본질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응급환자들의 ‘뺑뺑이’ 아우성은 날마다 커지는데 “비상진료 체계가 원활하다”고 자신하는 걸 넘어 “현장 한번 가보는 게 좋겠다”고도 했다. 그나마 정신승리는 군의관·공중보건의들을 응급실에 ‘돌려막기’ 하면서 나흘밖에 가지 못했다. 그 나흘 뒤엔 ‘퇴짜’를 놨던 2026년 증원안 조정을 수용하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열흘도 안 돼 무너질 그 자신감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여당의 어떤 이는 “외고집”이라 하고, 또 누구는 “달나라”라고 타박한다. 핵심은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여권 내부는 “의료는 그냥 두면 큰일 나는데, (이젠) 말하고 싶지도 않다”는 ‘자포자기’ 상태다. 친윤들조차 의·정 갈등을 걱정하면 “알아서 잘하겠다”는 답이 돌아오는데 어떻게 감히 말을 이어갈 수 있겠나.
확증편향 근저에는 ‘용산은 절대 옳다’는 병증이 자리한다. ‘짐이 곧 진리’여야 한다. 총선 참패에도 ‘국정방향은 옳았다’(4월16일 국무회의), ‘개혁 가시화’(경제정책방향 발표), ‘성과가 크다’(3차 국정브리핑)는 ‘3단 정신승리’는 그래서 가능하다. 고칠 줄 모르니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회복력이 없다.
두번째 특징은 역사와 ‘독대’하는 대통령의 ‘남 탓’이다. 임기 절반을 지나가는데 ‘전 정부 400조 부채 때문에 할 일을 못하겠다’고 한다. 국민은 “이런 대통령 처음 본다”며 가슴을 치는데, 대통령은 ‘살면서 이런 국회 처음 본다’고 한다. 성찰은 부재하고 원인을 딴 데서 찾으니 바른 판단이 나올 수 없다.
마지막은 ‘개념의 혼돈’상이다. 참모가 대놓고 “대통령은 뉴라이트 의미도 모를 것”이라고 하는 게 가능한 정부다. 개념 혼돈의 정점에는 “국정 목표는 오직 국민 행복”이라는 믿지 못할 말처럼 ‘국민’이 온다. 윤 대통령은 “상속세 완화, 기업 밸류업, 그린벨트 해제 등은 중산층을 위한 것”(예산안 국무회의)이라는데, 그것들이 어떻게 중산층에 도움이 되는지 알 수도 없지만, 이쯤이면 ‘중산층 의미도 모른 채’ 중산층을 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대통령의 권력과 권위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 기능이 작동하는 데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되기 때문이다. 그 권위가 무너지면 공직이든 사회든 통제도 수습도 어렵다. 그래서 권력을 더 틀어쥐려 하지만 때는 늦고 조롱만 당하기 쉽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모습이다. 윤 대통령도 위기를 느꼈는지 장관들에게 “공무원들이 국회에 나가 의기소침한 게 안타깝다”며 “격려”를 당부했다. ‘격려’라고 했지만, ‘단속’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이야 민심도 공직사회도 여당도 단속하고 싶겠지만, 세상은 이미 그렇지 않다. 사석에선 대통령실과 얽힌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뒷담화를 하는 게 공직사회 세태다. 대통령실에 차출이라도 될 것 같으면 아는 야당 의원에게 연락해 ‘보험’에 드는 레임덕이 현실이다. 여당의 오랜 당원들부터 ‘육두문자’를 쏟아내고, 당 자체는 “여름방학으로 텅 빈 교실 같다”고 한다. 대통령을 위해 싸울 의지도, 기력도 없다는 이야기다.
지도자는 아둔함이 가장 큰 죄악이고, 그래서 국민은 의심이 미덕이다. 지도자의 오만은 자신만 몰락시키지만, 아둔함은 조직을 미증유의 위험에 빠트린다. 그토록 센 민심의 채찍을 맞고도 달라진 것도 없고, 달라질 것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윤석열 정부의 ‘확증편향’은 아둔함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 민심이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뒤돌아 욕하는 시간도 길지 않을 수 있다. 당 태종은 위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스스로를 비추는 세 거울 중 하나를 잃었다고 애통해했는데, 윤 대통령에겐 하나의 거울도 없는 것인가.
김광호 논설위원 lubof@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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