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애 키우기 싫어서” [36.5˚C]

남보라 2024. 9. 1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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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커플이 여럿 있다.

'우리 아이들과 친구들은 한국에서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이와의 삶을 알아버린 나는 몇백 번을 되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최근 한 가지를 다짐했다.

아이들이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데 손을 놓는다면 "한국에서는 애 키우기 싫다"는 목소리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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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서울여성회와 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원들이 8월 3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OUT 말하기 대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주변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커플이 여럿 있다. 10년 전부터 아이들과 살고 있는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곤 했다. 무한한 용기를 주는 존재들과 함께하는 삶의 눈부심에 대해. 끝없이 나의 바닥을 확인하는 고통에 허덕이지만, 덕분에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었던 시간들에 대해. 하지만 그들은 끝내 이 한마디로 내 말문을 막는다.

“한국에서는 애 키우기 싫어서.”

‘한국’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 요람에서부터 시작되는 비교, 평생을 따라다닐 경쟁. 아이의 삶은 가엽고 부모의 삶은 가혹하다. 워킹맘이 되는 순간 직장에선 크고 작은 차별이 시작되고, 전업주부는 ‘맘충’이라는 멸시를 맞닥뜨린다. 자살률, 노인빈곤율 세계 1위가 20년 넘게 한 계단도 낮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국이 얼마나 척박한 서식지인지를 증명한다.

아이와 사는 삶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말라고 권유하던 나는 되레 불안해지고 만다. ‘우리 아이들과 친구들은 한국에서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이와의 삶을 알아버린 나는 몇백 번을 되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최근 한 가지를 다짐했다. 더는 다른 커플에게 아이라는 선택지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학교가 딥페이크(불법 합성물) 성범죄의 공간이 된 현실, 정부의 주먹구구 대책이 불러올지 모를 참혹한 미래 때문이다.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불모지에 닥친 긴 가뭄 같은 재난을 마주하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을 외칠 수는 없지 않은가.

국내외 미디어 학자들은 아이들에게 미디어와 기술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을 때 맞게 될 디스토피아에 대해 오랫동안 경고해왔다. 그 재앙은 ‘한국’에서 현실이 됐다. 미국의 한 보안업체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가장 많이 만드는 나라, 피해자가 가장 많은 나라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록. 10대들이 딥페이크 기술로 친구, 선생님의 사진을 나체와 합성한 음란물을 만들고도 “가짜인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는 나라. 수년 전 딥페이크 성범죄 문제가 불거졌지만 가해자 처벌도, 학교 교육도 그대로 방치한 결과다.

핀란드 호주 미국 독일 같은 교육 선진국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의무적으로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미디어 문해력)를 가르친다. 미디어를 비판적, 윤리적으로 사용하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자신의 사진으로 ‘가짜뉴스’를 만들어 디지털 기술의 역기능을 체감하고, 친구들과 기술의 윤리적 갈등에 대해 토론하며 익명의 공간에서도 건강한 시민으로 사는 방법을 오랫동안 연습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소프트웨어 사용법만 가르친다. 디지털 윤리 교육은 일회성 활동뿐이고 이마저도 학년이 올라가면 입시 교육에 밀린다. 그럼에도 정부는 피해자 지원 강화 등 사후대책만 내놨다. 다음 달 발표될 범정부 종합대책에 디지털 윤리 교육이 포함될지도 미지수다. 포함된다 해도 컨트롤타워 없이 교육부, 방송통신위원회 등 여러 부처에 산재해 있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뤄질지도 알 수 없다.

더는 이 참담한 범죄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만들지 않는 길은 기술 활용의 옳고 그름을 어릴 때부터 제대로 가르치는 일뿐이다. 아이들이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데 손을 놓는다면 “한국에서는 애 키우기 싫다”는 목소리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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