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진보에, 체질은 보수에 있었던’…남재희 전 장관 별세

이세영 기자 2024. 9. 1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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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 남재희(1934~2024)는 '방외인'을 자처했다.

이런 그가 박정희의 권유에 따라 공화당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고, 전두환의 신군부에서 민정당 소속으로 내리 3선을 한 건 '투항'을 넘어 '변절'로 보였다.

장관 재임 당시엔 복수노조를 지지하고, 단병호·이갑용 등 이른바 '전투적 노동운동' 쪽의 지도자들과 빈번히 만났는데, 그게 빌미가 돼 한국노총 등 보수적 노동계 일부로부터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념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가 만개하길 희망했던 "붉은 장미"는 여전히 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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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타계한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살아생전 남재희(1934~2024)는 ‘방외인’을 자처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방외인이 아니었다. 머리와 가슴으로는 진보를 그렸으되 몸은 한번도 체제를 벗어난 적도, 이탈을 시도한 적도 없다. 심지어 유신 본당(공화당)과 전두환의 직할 정당(민주정의당)에서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독재에 부역한 셈이다. 그러니 남재희는 생의 대부분을 ‘모순’과 ‘긴장’ 속에 살았다. 그 번민을 다스리려 술을 마셨고, 취기가 오르면 빨치산의 애창곡 ‘부용산’을 불렀다.

시작은 언론계였다. 1958년 한국일보 기자로 입문해 조선일보 문화부장, 정치부장을 지낸 뒤 서울신문으로 옮겨 편집국장을 했다. 조선일보 정치부장이던 1960년대 중반, 국제부장 리영희와의 충돌 사건은 오래 회자된다. 오전 편집회의 때 일본 총리의 방한과 베트남 파병 이슈 가운데 어느 것을 1면 머리기사로 올릴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다툼은 초판이 나온 뒤 몸싸움으로 번져 육중한 전화기 여러 대가 편집국 책상 위를 날았다. 두 사람은 ‘회사 내 진보파’에 속했으되 무슨 이유에서인지 서로를 경원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이승만 양아들 이강석의 부정편입 규탄 시위를 주도하긴 했어도 ‘행동가’는 아니었다.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에 기운 적은 있으나 훗날 영국의 페이비언주의를 접한 뒤 온건 사회민주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기자 시절엔 조봉암의 진보당 등 혁신정당을 출입했고 그 인연으로 혁신계 인사들과 오래도록 가까웠다.

지난 2015년 1월 남재희 전 장관이 신진욱 중앙대 교수와 한겨레 특집대담을 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이런 그가 박정희의 권유에 따라 공화당 소속으로 금배지를 달고, 전두환 신군부가 급조한 민정당과 그 후신 민자당에서 내리 3선을 한 건 ‘투항’을 넘어 ‘변절’에 가까웠다. 물론 이런 이력을 그가 자랑스러워한 적은 없다. 5공 시절엔 정권 강경파가 주도한 학원안정화법에 반대했고, 국회 국방위 회식 자리에서 신군부 실세들의 맹동을 참지 못해 술잔을 던졌다가 발길질을 당했다.

그렇다고 군부독재에 협력한 일을 확실하게 반성한 것도 아니다. 2006년 펴낸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이란 책에서 “준군사통치 세력과 그 반대 세력, 유신 세력과 반유신 세력이 대치하고 있을 때 명색이 지식인이라고 사회의 평가를 받고 있는 나로서는 의당 반유신 세력에 가담했어야 옳았다. 그러지 못하였으니 공격을 받아도 할 말이 몸속으로 기어든다”고 썼을 뿐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김영삼 정권 아래선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현대중공업 파업 당시 확대국무회의에서 ‘특단의 조치’를 강조하는 대통령을 향해 “각하, 안 됩니다. 제가 원만히 해결해보겠습니다”라고 외친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주무 장관으로서 복수노조를 지지하고, 단병호·이갑용 등 이른바 ‘전투적 노동운동’ 쪽의 지도자들과 빈번히 만났는데, 그게 빌미가 돼 한국노총 등 보수적 노동계 일부로부터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만년엔 회고록과 정기간행물 연재 등 집필 활동에 집중하는 한편, 틈나는 대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으로 이어진 진보정당 내 평등파 그룹과 교류했다.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을 응원했고, 심상정 등 현역 의원들은 물론 장석준, 신장식 등 원외의 젊은 정치인들에게도 수시로 자문했다. 2015년 초 중앙대 교수 신진욱과 함께한 한겨레 대담에선 “감동을 주는 진보” “국제적 관점을 갖춘 진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2016년엔 “한겨레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밑거름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며 소장하고 있던 도서 1만여권을 기증할 만큼 진보언론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이 논쟁적 사내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낸 글은 지금은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무람없어진 한 시인의 것이다. “의식은 야에 있으나/ 현실은 여에 있었다/ 꿈은 진보에 있으나/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 시대는 이런 사람에게 넉넉히 술을 주었다.”(고은 ‘만인보’ 남재희 편)

생의 대부분을 책과 사람과 술을 벗해 살아온 남재희는 지난 15일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잔디 푸른 부용산 허리를 감아돌아 하늘로 떠났다. 그가 만개하길 응원했던 “붉은 장미”는 아직 피어나지 못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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