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무기 된 `삐삐`…가방·호주머니서 `펑` 폭발에 레바논 아비규환

박양수 2024. 9. 1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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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가게·도로 등서 무선호출기 동시 폭발
사상자 수천 명 쏟아져
"전화 당장 끊어" 공포 질린 주민들
눈·손 잃은 환자들로 병원 마비
17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의 병원 앞에 무선호출기 폭발로 다친 피해자의 가족과 지인들이 걸어가고 있다. [베이루트 EPA=연합뉴스]
17일(현지시간) 호출기 폭발 이후 분주한 레바논의 병원 앞. [베이루트 로이터=연합뉴스]

17일(현지시간) 레바논 전역에서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무선호출기(삐삐) 수백 대가 동시에 폭발하는 바람에 수천 명이 죽거나 다치면서 나라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주민들은 사람들의 가방이나 호주머니, 혹은 손에 있던 호출기가 폭탄으로 변해 터지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한순간에 눈과 손을 잃은 환자들이 쏟아져 나와 병원들은 아수라장이 됐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영국 BBC 등 외신들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30분쯤부터 레바논 전역에서 헤즈볼라 대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선호출기 수백 대가 동시에 폭발했다.

이번 폭발로 최소 9명이 숨지고 2750명이 다쳤다고 레바논 보건부가 발표했다. 부상자 가운데 약 200명은 위독한 상태인 것으로 전했다.

무선호출기는 국내에선 1990년대 '삐삐'로 불리며 널리 쓰였던 통신기기로, 간단한 문자 메시지와 전화번호를 송수신할 수 있다. 헤즈볼라는 휴대전화가 위치추적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최근 몇 달간 호출기를 도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폭발은 레바논 남부와 동부 베카밸리, 수도 베이루트 남부 교외 등 헤즈볼라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소셜미디어(SNS)에 올라온 영상과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자기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어둔 호출기가 몇차례 경고음을 울린 직후, 갑자기 폭발하면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헤즈볼라 당국자들에 따르면 폭발 직전 호출기에는 헤즈볼라 지도부가 보낸 메시지로 보이는 알림이 떴다. 그러나 이 알람은 지도부의 메시지가 아닌 폭발을 활성화하는 신호였다. 신호가 울린 뒤, 곧이어 수백 대의 호출기들이 폭발했다.

이날 레바논의 한 가게에서 찍힌 CCTV 영상에는 과일을 사고 있던 한 남성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호출기가 터지면서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이 담겼다.

바로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과일을 고르던 여성은 갑작스러운 폭발에 놀라 아이들을 감쌌으며, 가게 직원도 급히 도망가는 등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폭발이 주로 발생한 베이루트 남부 교외 주민들은 주변에서 갑자기 폭죽이 터지는 것과 같은 폭발음이 들린 뒤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고 전했다.

폭발 현장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무함마드 아와다(52)는 차에 함께 타고 있던 아들이 "(피해)남성의 잘린 손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정신을 놓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고 NYT에 말했다.

베이루트 인근 바스타 지역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아흐마드 아유드는 "폭발음이 들린 뒤 가게 밖 도로에서 한 20대 남성이 피를 흘리면서 타고 있던 오토바이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모두 그가 무슨 총격에 다쳤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러다가 몇 분 뒤 다른 사례들을 듣기 시작했다. 모두 호출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피해자 대부분은 손이나 얼굴, 복부를 다쳤으며 열 손가락을 모두 잃거나 두 눈이 심각하게 다친 이들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쏟아지는 환자에 병원들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병원 밖에는 초조하게 경과를 기다리는 환자 가족들로 장사진을 이뤘으며, 의사가 부족해지자 인근 수의사와 약사, 치과의사들까지 치료에 동원됐다.

한 병원 관계자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며 일부 장면들은 끔찍하다. 많은 피해자가 손가락을 잃었으며 일부는 열 손가락을 모두 잃었다"고 BBC에 말했다.

레바논 남부 도시 시돈의 병원들을 찾은 한 의사는 눈을 다친 환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이들을 치료할 안과 의사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NYT에 전했다.

레바논 전역의 적십자사 사무소에는 치료에 필요한 피를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눈앞에서 수많은 이들이 쓰러지는 것을 본 주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베이루트 남부 교외에 사는 주부 움 살레는 "완전한 혼돈 상태"라며 "오늘 오후에 벌어진 일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들은 자신들의 휴대전화도 터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식자재를 구매하던 한 여성은 휴대전화가 울리자 전화를 받자마자 "제발 (전화를) 끊어라!"라고 외치기도 했다.

BBC는 잦은 분쟁으로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레바논에서도 이날 벌어진 일의 규모와 성격은 전례가 없는 불가해한 일이라고 전했다. 박양수기자 yspar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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