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페이크 처벌 관련 발의안 쏟아졌지만…“입법자의 고민 절실”
8월22일 한겨레 단독 보도로 참여인원만 22만명에 이르는 텔레그램 불법합성방의 실체가 드러났다. 불법합성물(딥페이크) 집단 성범죄 사태가 우리 사회에 충격을 안겨준 지도 3주째, 그동안 국회에서는 35건의 발의안이 쏟아졌다.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뽑을 대안을 마련하라는 시민들의 요구에 국회가 화답한 결과다.
3주만에 35개 법안 발의…내용은 21대 국회 때와 ‘대동소이’
12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달 22일부터 이날까지 22일 동안 모두 35건의 법안이 발의됐다. 성폭력처벌법 개정안 23건, 성폭력방지법 개정안 3건, 정보통신망법 9건 등이다.
그 면면을 살펴보니, 21대 국회에서 발의됐다가 임기 만료로 폐기된 법안들과 대동소이했다. 우선, 허위영상물을 소지·구입·저장·시청하는 행위까지 처벌하는 내용의 발의안이 15건으로 가장 많았다. 현행법(성폭력처벌법 14조2)은 허위영상물을 제작해 실제 유포했거나, 유포 목적이 입증된 제작 행위만을 처벌해 허위영상물 소지·시청만 가담자까지 처벌하기는 한계가 있다.
이 밖에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한정해 허용된 위장 수사를 성인 대상으로 확대하는 법안, 디지털 성범죄로 벌어들인 수익을 의무적으로 몰수하는 방안 등도 제안됐다. 모두 20·21대 국회에 발의됐으나 폐기된 발의안들이다.
4년 전 국회 “일기장에 혼자 그림 그리는 것까지 처벌 안 돼”
이처럼 수십 개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과거 엔(n)번방 방지법(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 개정안) 논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실효성 있는 결과가 도출될지는 미지수다. 22대 국회에 발의된 불법합성물 관련 법안 가운데 절반(42.8%)가량인 ‘허위영상물 소지·구입·시청·저장 행위에 대한 처벌’ 내용은 지난 2020년 엔번방 방지법 논의 과정에서도 다뤄졌으나, 일부 국회의원과 관계자들의 몰이해로 결국 개정안에 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2020년 3월3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입법자들의 고민 부재가 어떤 결과를 빚어내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도읍, 정점식 당시 미래통합당 의원은 불법합성물 처벌조항 신설 자체에 회의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김 의원은 “굳이 (불법합성물 범죄를 지칭하는) 새로운 구성요건을 만들 필요가 있나. 그냥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면 음란물로…”라고 말했고, 이어 정 의원도 “음화제조 반포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했다. 별도 법을 신설하지 않아도 음화제조 반포죄(음란한 문서, 도화, 필름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 또는 상영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로 처벌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1999년 대법원 판례에 따라 형법에서 반포·판매·제조·소지 등을 금지한 ‘음란한 문서, 도화, 필름 기타 물건’에 컴퓨터 프로그램 파일은 포함되지 않는다.
처벌 행위를 ‘유포’로 한정한 개정안의 문구 역시 일부 의원과 관계자들의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에서 탄생했다.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가지고 나 혼자 즐긴다 이것까지 (처벌) 갈 거냐”(정점식 의원),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만들 수도 있거든요”(김인겸 당시 법원행정처차장), “청소년들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하거든요… 그것까지 처벌하겠다고 하는 건 너무 과한 것 아니냐”(김오수 당시 법무부 차관), “내 일기장에 내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피해자의 고통보다는 가해자의 욕구를 중요시하는 듯한 발언이 쏟아졌다.
지인이 자신의 사진을 불법합성하고, 성적 대상화하며 모욕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신뢰관계에도 영향을 준다”(형사·법무정책연구원, ‘디지털 성범죄 대응체계 개선연구’·2024)는 점은 당시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엔번방 방지법이 통과됐지만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단체들이 한목소리로 “졸속 입법”을 지적한 까닭이다.
피해자 고통 이해하고 진화하는 범죄 양상 반영해야
전문가들은 22대 국회에서 수준 높은 논의가 이뤄지려면 디지털 성폭력 ‘피해’란 무엇인지 규명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여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겪는 불안은 유포 전·후를 가리지 않고 연속적으로 발생하는데, 현행법은 유포 이후 피해자가 겪을 ‘성적 수치심’만을 고려해 제정됐다”고 짚었다. 그는 “법 조항 하나를 추가하는 차원이 아니라, 피해자의 연속적 불안을 담아낼 수 있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지기 위해 입법자의 고민과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불법촬영, 허위영상물 관련 처벌 조항이 공통적으로 담고있는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라는 문구가 특정 신체의 노출을 디지털 성범죄의 필수조건으로 인식하게 하는 협소한 틀을 만들고 있다”며 “일상적인 이미지도 본인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되는 방식으로 생성되면 불안감, 불쾌감, 위축감 등을 유발하는 성범죄인 만큼 기존의 문구를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예를 들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여성을 타겟 삼아 행해지는 딥페이크 범죄는 여성을 위축시키고, 두려움에 떨게 하며 자책, 나아가서는 자살까지 부르는 굉장히 심각한 수준의 젠더 기반 폭력”이라며 “일부 청(소)년의 비행, 일시적인 현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서는 엔번방 때의 과오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현행법이 오프라인 범죄를 근간으로 만들어져 온라인 범죄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보다 근본적인 법체계 개선도 함께 논의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등 전문위원회 팀장을 지낸 서지현 전 검사는 “디지털 성범죄 대응체계 마련을 위한 필수 과제들을 권고안에 담았지만, (전문위가) 활동 도중 해체돼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은 데다 이마저도 2년 전 나온 결과물이어서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형법과 형사소송법 자체가 오프라인상 범죄를 토대로 만들어져 온라인 범죄에 대응하기에 부족한 한계가 있어 법 제도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빠르게 산업화, 대중화되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입법자들의 고민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김건희·채상병 특검법’ 19일 처리되나…전운 감도는 여의도
- 72살 친구 셋, 요양원 대신 한집에 모여 살기…가장 좋은 점은
- “재앙이다”…바다가 27년째 땅으로 뱉어낸 용·문어 레고의 경고
- 하나회 술자리서 ‘술잔 투척’ 남재희…노태우는 “맞아볼래” 협박
- 가다 서다 답답하지만…추석 귀경길 정체, 정점 찍고 꺾였다
- 홍준표 “김건희 여사 지금 나올 때 아냐…국민들 더 힘들게 할 수도”
- 트럼프 암살 시도 ‘백인 남성’, 현장서 12시간 기다렸다
- 미 힙합 거물 ‘퍼프 대디’ 뉴욕서 전격 체포…성폭행 혐의 관측
- 강남역서 실신한 배우 “끝까지 돌봐주신 시민 두 분께…”
- 영화 속 ‘김우빈 무도실무관’, 현실에서 진짜 채용공고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