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서 무선호출기 동시 폭발···손 절단 등 2700여명 사상
12명 사망·2750명 부상, 200명 중태
‘휴대전화 금지령’에 올 봄 호출기 도입
“이스라엘 헤즈볼라 공급망 침투 가능성”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에서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구성원들이 소지한 무선 호출기가 17일(현지시간) 동시에 폭발하며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레바논 정부와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원격 공격’이라며 자국에 대한 테러와 주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AP·로이터통신 등 보도에 따르면 폭발은 이날 오후 3시30분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다히예와 동부 베카 일대에서 일제히 시작됐다. 이곳은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는 헤즈볼라의 거점 지역이다. 폭발은 약 1시간 동안 지속됐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일대에서도 폭발이 보고됐다.
레바논 보건부는 동시다발적인 폭발로 8세 소녀 등 아동 2명을 포함해 최소 12명이 사망했고 275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 가운데 200여명이 중태라고 밝혔다. 부상자 가운데는 모즈타바 아마니 레바논 주재 이란 대사도 포함돼 있으나 비교적 경미한 부상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상자 대부분이 손과 얼굴, 복부와 엉덩이 주변에 부상을 입었다. 손이 절단된 피해자도 다수인 것으로 전해졌다.
부상자 및 목격자 증언과 폭발 장면이 찍힌 영상 등을 종합하면, 무선호출기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고 메시지를 확인하고자 호출기에 손을 대거나 얼굴을 가까이에 대고 화면을 보는 과정에서 폭발이 발생했다. 호출기가 뜨거워지다가 폭발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온라인에 공개된 한 영상에는 한 남성이 슈퍼마켓에서 과일을 고르던 중 메고 있던 가방에서 폭음이 들리며 쓰러지는 모습이 담겼다.
폭발이 발생한 호출기는 헤즈볼라가 최근에 도입한 모델이다. 헤즈볼라 최고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는 지난 2월 이스라엘의 위치 추적을 우려해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이후 헤즈볼라는 통신 수단으로 무선 호출기를 채택했다. 국내에선 ‘삐삐’라고 불리며 휴대전화가 대중화되기 이전인 1990년대 폭넓게 사용됐다.
레바논 고위 안보 소식통은 헤즈볼라가 대만 골드 아폴로사의 무선 호출기 AP924 모델 5000대를 주문했으며, 올해 봄 호출기가 레바논 안에 들어왔다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이 모델은 무선으로 문자 메시지를 수신할 수 있으나 전화는 걸 수 없다.
이 소식통은 이스라엘 해외 정보기관 모사드가 몇 달 전 헤즈볼라가 주문한 호출기 5000개에 소량의 폭발물을 심었다고 말했다. 미 뉴욕타임스도 복수의 미국 당국자들을 인용해 이스라엘이 호출기 안에 1~2온스(28.3~56.6g) 정도의 폭발물을 심었고, 호출기엔 원격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 스위치도 내장돼 있었다고 전했다.
다만 제조사로 지목된 골드 아폴로 측은 성명을 내고 폭발에 사용된 호출기가 자사 생산 제품이 아니며, 골드 아폴로와 상표권 계약을 맺은 유럽의 유통사가 생산하고 판매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 경제부도 호출기가 대만에서 레바논으로 직접 수출된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호출기 공급망에 침투했을 수 있다며 이번 폭발이 모사드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전직 영국군 장교이자 폭발물 처리 전문가인 숀 무어하우스는 “연필 지우개만 한 작은 폭발물이 (호출기에) 미리 삽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무선 호출기가 헤즈볼라에 공급되기 전 삽입됐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모사드 작전이 매우 성공적이라는 의미”라고 AP통신에 말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도 휴대전화 등 개인 통신기기를 이용해 하마스 대원 등을 암살한 전례가 있다. 로이터통신은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휴대전화에 폭발물을 삽입하거나, 해커들이 원격으로 악성 코드를 주입해 휴대전화를 과열시켜 폭발시킨 전례가 있다고 전했다.
레바논 정부는 이 공격이 “이스라엘의 사이버 공격”이라며 “레바논에 대한 주권 침해”라고 규탄했다. 헤즈볼라는 사망자 가운데 2명이 헤즈볼라 대원이라며 이스라엘을 향해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스라엘군은 이번 사건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다. 매슈 밀러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 정부가 이 사건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으며,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번 폭발은 이스라엘 안보 내각이 레바논 국경지대에서 대피한 이스라엘 북부 주민들이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도록 헤즈볼라의 공격을 중지시키는 것을 공식적인 ‘전쟁 목표’에 추가한 지 몇 시간 만에 발생했다. 최근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도 분쟁의 중심축이 가자지구에서 레바논과 국경을 맞댄 북부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지난해 10월 가자지구 전쟁 발발 후 국경지대에서 무력 충돌을 이어 왔다. 이스라엘이 지난 7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공격, 헤즈볼라 최고위급 사령관인 푸아드 슈크르를 암살하며 그간 국경지대에 한정됐던 양측의 무력 충돌이 레바논 수도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이 레드라인을 넘었다”며 보복을 천명했고, 지난달 25일 서로의 영토를 겨냥해 최대 규모 공격을 주고받는 등 갈등이 격화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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