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내가 강간살인"…DNA에 무릎꿇은 이춘재, 소름 돋는 '자백'[뉴스속오늘]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와서 내가 한 짓이 드러날 줄 알았다."
영화 '살인의 추억' 실제 범인 이춘재가 결국 자백하며 남긴 말이다. 역사상 최악의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 진범 이춘재는 심리전에 휘말린 뒤 DNA라는 명백한 증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DNA가 나왔다니 할 수 없겠다"는 말도 했다.
이춘재가 처음부터 범행을 인정한 건 아니다. 수사기관이 DNA를 통해 진범을 특정한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 2019년 9월18일, 프로파일러가 부산교도소에서 이춘재를 처음 마주했을 땐 입을 꾹 다물었다.
장기 미제였던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는 2019년 새 국면을 맞았다. 그해 여름, 과학수사 기법이 발전한 덕분에 경찰이 보관하던 증거물 속 DNA와 일치하는 인물을 특정하게 됐다. 일치한 인물이 바로 이춘재였다.
그리고 그 해 9월18일 경찰은 이춘재를 접견하면서 재수사를 개시했다. 그는 처제 살인 사건으로 부산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다. 교도소에서 이춘재는 프로파일러 등으로 구성된 수사팀을 처음 마주했다.
이춘재는 당장 입을 떼지는 않았다. 수사팀은 DNA 검출 등 결정적인 '패'를 드러내지 않았다. 19일, 20일 2·3차 조사가 이어졌지만 이춘재는 계속 잡아뗐다.
"살인 14건, 강간·강간미수 30여건."
9월24일 접견 때부터 흔들리던 이춘재는 결국 10월1일 이뤄진 아홉 번째 조사에서 자백했다. 상세하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신의 범행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이어 11차 조사에서는 모방범죄로 결론 났던 8차 사건도 자신의 짓이라고 실토했다.
DNA가 검출된 사실을 알게 된 데다 자신의 가석방이 불가능하다는 걸 인식하면서 그는 무너졌다. 프로파일러와 라포(정서적 신뢰감)가 형성된 이후 심경의 변화가 컸다고 한다. 수사팀은 라포를 형성한 상태에서 DNA 감정 결과를 제시했다.
프로파일러는 라포 형성을 위해 용의자를 대면하자마자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와 같은 말을 건넨다고 한다. 이춘재 사건엔 또 다른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자백을 받아낸 베테랑 프로파일러도 투입됐다.
이춘재에 대한 접견은 모두 52회에 걸쳐 진행됐다. 그는 접견을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고 자료 없이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범행에 대한 진술을 이어갔다고 한다.
역대 최악의 강력범죄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14건에 걸쳐 발생했다. 이 기간 이춘재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범행을 저질렀다.
용의선상에 여러 사람이 올랐지만 진범을 특정하지는 못했다. 사건의 공소시효는 2006년 끝났다. 공소시효와 별개로 재수사를 벌인 끝에 결국 진범을 잡았다.
경찰은 수사 결과를 최종적으로 발표하면서 이춘재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가학적인 범행을 이어갔다고 결론 내렸다.
피해자는 9세 초등학생부터 71세 노인까지 있었다. 사건은 14건 중 11건이 경기 화성에서, 1건이 인근 도시인 수원에서 발생했고 나머지 2건은 충북 청주에서 있었다.
이춘재는 사건 발생 당시 수사선상에 올랐고 세 차례나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수사망을 피했다. 당시엔 과학수사에 한계가 있었고 수사 환경이 열악했다. 이춘재의 발 크기와 혈액형이 증거물과 다른 게 그가 풀려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며 자백을 강요하고 신체를 구금하는 등 위법행위도 저질렀다.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도 있었다.
이춘재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나 이 사건에 따른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다만 처제 살인 사건으로 이미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이춘재는 2020년 11월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진범으로 특정된 데 대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며 "사건이 영원히 묻힐 것이라고는 생각 안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스치듯 지나갔다"고 했다.
양성희 기자 ya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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