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할머니 봤어요" 사례금 요구한 제보…순식간에 2000만원 잃었다
[편집자주] 머니투데이 사회부 사건팀은 지난 4개월간 전국 각지에서 실종 가족들을 만났다. '2024 실종리포트-다섯가족 이야기'는 한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실종 가족들에 대한 기록이자 오늘날 가족의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의 이야기다.
그림을 좋아했던 24살 수연씨는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밤 8~9시. 고단한 하루 끝에는 언제나 그렇듯 할머니가 있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한 탓에 수연씨는 할머니 손에서 '귀하게 자랐다'.
수연씨에게 할머니는 엄마였고, 아빠였다.
매일 아침 냉장고에 있는 콩 우유도, 퇴근 후 식탁 위에 차려진 고봉밥도 할머니가 준 사랑이었다. 할머니는 개봉동에서 가장 목청 큰 싸움꾼이기도 했다. 첫 손녀인 수연씨에게 항상 '내 편'이 돼주는 든든한 존재였다. 수연씨는 이렇게 개봉동 한 주택에서 할머니와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나 내 편이었던 할머니가 어느 순간 '깜빡깜빡'했다. 하루는 김치가 냉장고 안에서 썩어 하얗게 곰팡이가 피었다. 수연씨가 출근할 때 버린 김치를 할머니가 다시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할머니 이거 썩었어. 이거 진짜 버려야 하는거야. 이거 못 먹어."
"아니야, 아니야!"
매일 밤이 지옥이었다. 밤 9시부터 새벽 6시까지 30분마다 이 일을 반복했다. 사랑하는 할머니는 어느새 애증의 존재가 됐다. 19년 전인 2005년, 24세의 수연씨는 할머니 변화를 이해하기에 너무 어렸다.
◇"시계방 좀 다녀올게"…엄마였고 아빠였던 할머니가 사라졌다
2005년 6월 26일, 일요일 밤 8시였다. 방 안에서 쉬고 있는데 할머니가 연두색 옷을 입고 들어왔다.
"아가, 할머니 잠깐 동네 앞에 시계방 다녀올게."
"지금 이 시간에?"
"시계방 수리 맡겼는데 깜빡하고 못 갔다왔어."
"어? 알겠어. 그럼 빨리 다녀와."
할머니는 기억을 깜빡해도 손녀 이름, 집 주소는 잊지 않았다. 평소에도 동네를 곧잘 다녔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자연스러웠다.
30분 뒤, 창문 밖에서 두두두두 빗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에 나가서 주변을 살폈는데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수연씨는 불안한 마음에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 시장, 시계방을 돌아다녔다. 3시간이 넘어도 할머니는 보이지가 않았다. 밤 12시 수연씨는 지구대로 달려갔다.
"할머니가… 할머니가 없어졌어요."
"성함이랑 나이는요?"
"75세 김순기 할머니요. 치매가 있어요."
"성인은 실종 신고는 안 되고 처음에 가출 신고로 접수가 돼요. 좀 더 기다려보고 안 되면 그 때 실종 신고로 할게요."
"뭐라도 좋아요. 제발 찾아주세요."
지구대 밖을 나오는데 머릿 속이 하얘졌다. 개봉동은 광명, 부천, 서울 시내까지 이동할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수연씨는 뛰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가슴이 턱… 180도 달라진 삶
'곧 돌아올 거야.' 마음 한 켠에 믿음이 있었다. 대문, 현관문도 모두 열어놓고 할머니를 기다렸다. 날은 어두워고 집은 고요했다. 매일 저녁 "수연아" 외치던 할머니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수연씨는 개봉동 일대를 미친듯이 돌아다녔다. 온종일 할머니만 찾아다녔다. 사람 얼굴만 봤다. 뒤를 돌아본 사이에 놓쳤을까 다시 몸을 돌려 사람 얼굴을 살폈다.
다음날에는 구로구 근처에 있는 응급실, 요양원 수십 곳을 찾아갔다. 병원 사람들을 붙잡고 할머니 사진을 꺼내 물었다. "저희 할머니인데요. 혹시 여기 '김순기' 할머니 없나요?"
"글쎄요. 처음 보는데요."
"그런 분 없는데요."
"몰라요. 나가주세요."
온 힘을 다해 참았던 눈물이 누군가 툭 찌르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애써 입술을 꽉 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서울 구로경찰서에 찾아가서 머리카락 DNA를 등록했다. 실종 신고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치매 노인은 2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실종 아동이었다. 2005년에는 치매가 우리 사회에 생소한 병이었다.
잠드는 게 괴로웠다. 도저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할머니는 밥을 먹었을까'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 달 만에 10㎏가 빠졌다. 배 근육이 과도하게 수축돼서 병원에서 근육을 푸는 주사를 맞았다.
◇사기인 것을 알지만…거부할 수 없는 '제보전화' 그렇게 2000만원을 잃었다
할머니 고향은 서울 종로구였다. '치매에 걸리면 예전 기억에 산다는데 우리 할머니도 그럴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매일 같이 개봉동에서 종로구를 찾았다.
"이렇게 생긴 할머니 보셨나요? 이마에 사마귀도 있고 안경도 두껍거든요."
"모르겠는데요."
하루는 조계사 근처에서 할머니를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할머니가 한 여성의 손을 잡고 무료 급식소 안에 들어갔다고 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발… 제발…'
1년 동안 매일 오전 11시 조계사 앞에 찾아갔다. 탑골공원 앞에 길게 줄 선 어르신들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수연씨는 소중했던 디자인 일도 포기했다. 낮에도 할머니를 찾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지나는 이들에게 실종 전단지를 건네면 손을 저었다. 좌절할 여유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제보 전화가 왔다. 사례금도 요구했다. 본인이 탐정인데 300만원을 주면 찾아주겠다는 연락도 받았다.
사기인 것을 알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수연씨는 6개월 동안 2000만원을 잃었다.
◇19년이 흘렀지만… "사망 신고, 못하겠어요"
벌써 19년이 흘렀다. 24살 수연씨는 올해 43살이 됐다.
시간은 흘렀지만 수연씨는 할머니 손을 놓지 못했다. 19년째 할머니 사진을 코팅해서 지갑에 넣고 다닌다. '왜 너만 과거에 매여있니' '사망신고를 하는 건 어떠니' 여러 말을 듣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안 해요. 그냥 무연고 시신이라도 할머니를 발견할까봐. 사망 신고하면 그것도 못하니까 포기를 못하는 거에요."
정신 없는 일상을 보내다 갑자기 슬픈 감정이 가슴 깊이 파고들 때가 있다. 우연히 마트에서 콩 우유를 볼 때, 생전 할머니가 좋아하던 김밥을 볼 때다.
"진짜 힘들어요. 하나가 떠오르면 연달아 생각나거든요. 저는 19년째 콩 우유를 못 먹어요. 보면 생각나고 눈물 나니까. '배회중이니 연락주세요' 알림 문자도 보면 빨리 지워요."
추석이 다가오면 더 먹먹하다. 명절에 대한 기대도 없다.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 마음만 아프니까 가족들도 굳이 꺼내지 않는다. 작년에는 용기를 내서 개봉동에 있던 집을 방문했다. 시간은 흘러 집은 사라지고 빌라가 들어섰다.
19년이 지나도 상처는 여전하다. "저 오늘 담담하게 말했지만 당분간 아플 거에요. 이게 참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결국 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있었잖아요. 할머니가 보고 싶어요."
평범한 4월이었다. 31살 젊은 아빠는 골프연습장 공사에 연일 구슬땀을 흘렸다. 큰 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공부에 관심 없다는 딸 희영이를 위해서였다. 초교 4학년 희영이가 학교에서 받아온 시험지엔 비가 내렸다.
'공부 좀 못하면 어때. 운동 뒷바라지를 해줘야겠다.'
아는 문제도 틀려 온 딸 손바닥을 자로 몇 대 때린 일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30년 전 서기원씨(61)는 사업가로서 성공해 딸을 뒷바라지해주는 것만이 딸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동네에는 희영이를 놀아줄 사람이 많았다. 학교, 집, 외갓집, 놀이터까지 모두 반경 1㎞ 안에 있었다. 하교하면 외갓집에 가서 책가방을 두고 집에 들러 용돈을 챙긴 뒤 놀이터로 갔다. 친구들과 봄볕에 얼굴이 그을릴 때까지 놀았다. 저녁 무렵 친구들과 헤어지면 외갓집으로 향했다. 세 명이나 되는 이모와 또 놀았다.
1994년 4월27일 수요일 오후 5시쯤. 여느 때처럼 공사 중이던 서씨는 희영이 이모에게 전화를 받았다.
"형부, 희영이가 저희 집에 안 왔어요. 희영이 집에 있나요?"
◇"형부, 희영이가 안 왔어요"…젊은 아빠 등줄기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서씨는 희영이가 신나게 놀다 지쳐 잠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을 잠시 접고 집으로 향했다. 희영이는 집에 없었다. 서랍에 넣어둔 용돈에서 동전이 없었다. '몇백원을 빼다 쓴 모양이군.' 서씨는 횡단보도를 건너 남원시청 뒤 놀이터로 갔다. 아이가 없었다. 처제가 다른 놀이터도 찾아봤지만 없었다고 했다.
구멍가게에 갔다. 주인은 희영이가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고 했다. 다시 시청 앞 도로를 건너 중앙초등학교에 갔다. 희영이는 이곳에서 친구들과 자주 자전거를 탔다. 학교에도 아이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봤지만 "놀다 헤어졌다"고 할 뿐이었다.
오후 7시.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차 핸들을 잡은 손이 계속 미끄러졌다. 남원역(지금은 폐역이 됐다) 앞 역전파출소로 갔다. 서씨의 마음은 급한데 사람들은 속 편한 소리를 했다. "뭐 어디 갔겠어요, 놀고 있겠죠. 사장님 조금만 기다리시죠." 30년전 파출소 직원 말이 아직도 서씨를 괴롭힌다.
"뭔가 이상하다니까. 친구들이랑 지금껏 놀면 '아빠 나 좀 놀다 갈게요' 할 애지, 연락도 없이 갈 애가 아니라니까. 바로 좀 찾아줘 봐요. 진짜예요. 사고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니까요."
서씨의 호소에도 경찰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실종 신고 후 72시간이 지나기 전에 경찰이 초동수사를 벌일 수 없었다.
파출소를 나온 서씨는 병원 응급실과 개인 병원들을 찾았다. 한 줄 한 줄 뜯어봐도 '서희영' 이름 석 자가 없었다. 여자아이는 아예 안 들어왔다는 말만 돌아왔다.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응급실이 아닌 남원의료원 영안실로 갔다. "여자아이 시체 들어온 게 있습니까." 아버지는 몸을 떨며 묻고 또 물었다.
밤이 돼도 희영이는 집에 오지 않았다. 친구들과 차 몇 대를 나눠 타고 희영이를 찾았다. 광한루, 절, 하천가. 아이는 없었다. 동이 튼 아침에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사고가 아니라면 사건이었다. 유괴 후 살해됐을 것이라는 데 상상이 미쳤다. 동네에서 소문이 안 좋다는 남자들을 찾아다녔다. 사체라도 발견할까 등산로가 아닌 지리산 산기슭을 뛰어다녔다. 아이가 없었다. 실종 후 약 10시간 뒤 희영 외가, 친가 식구들이 그의 집으로 모였다. 가족들은 울었지만 아버지는 울지 못했다.
동네 광고상에 전단과 현수막 제작을 맡겼다. 수천장을 인쇄해 전북 남원 인근 도시인 장수, 곡성, 순천에 붙였다. 방송국에도 보도를 부탁했고 저녁 뉴스에 희영이 실종 소식을 전했다. "부산에서 본 것 같아요" 제보가 오면 부산으로, "곡성에서 봤어요" 하면 곡성으로 갔다.
실종 72시간이 지난 뒤 경찰이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탐문 수사를 벌였다. 이게 그때 그 시절 매뉴얼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서씨는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에 갔다. "실종 수사 제일 잘하는 사람 연결해주십시오." 서씨 말에 돌아온 답은 "초동수사에서 놓쳤는데 여기서 어떻게 찾습니까" 였다.
서울에서 남원으로 돌아가는 길, 그때서야 눈물이 났다. 가족들 마음이 약해질까 보일 수 없었던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차도 안 막히는 귀갓길이 8시간이나 걸렸다.
동네에 의심되는 남자 집 앞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 불법 행위인 줄 알면서도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윤락가를 뒤졌다. 국문학을 전공한 희영의 이모가 절절한 편지 3000장을 손으로 써 보육시설, 장애인시설에 보냈다.
"우리 시설에 그런 아이는 없습니다."
단 2곳에서만 답장을 받았다.
◇실종 후 30년, 누구보다 열심히 산 아버지…'희영이도 어디선가'
희영이가 사라졌다. 사라진 지 30년이 된 지금 희영이가 면식범에 의해 살해됐거나 해외로 입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서씨는 생각한다. 사체나 유골 등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생존 가능성은 50% 정도. 그 확률에 서씨는 남은 인생을 쓰고 있다.
'희영이도 어디선가 혼자 지내지 않을까.'
서씨는 1994년부터 10년간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나섰다. 그 아이들은 겨울에도 불을 못 때 이불을 높게 쌓아 잠을 잤다. 폐차 안에 자며 밖에서 생활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서씨는 자기 집 1층을 내주고 비디오를 틀어줬다. 자기 돈으로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그때는 한 명 한 명이 희영이 같았다고 한다.
희영이를 찾는 일은 서씨의 삶이 됐고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 실종 가족이 겪는 어려움이 서씨에게도 찾아왔다. 서씨 부부는 아픈 이별을 경험했다. 서씨가 벌어둔 재산도 점점 줄었다. 집도, 사업장 8개도 모두 팔았다. 1990년대 동네 몇 대 없던 외제차들도 팔았다. 이제는 중고차를 몬다.
그는 아이가 사라진 뒤 이듬해 '전국 실종자 가족들의 모임' NGO 단체를 결성했다. 2008년 실종아동찾기협회 대표를 맡은 뒤 매년 자기돈 2억원을 운영에 썼다.
2005년이 돼서야 제정된 실종아동법에는 서씨의 땀과 눈물이 섞였다. 실종 신고 후 경찰이 사흘을 기다려야 했던 매뉴얼은 사라졌다. 현재는 경찰이 신고와 동시에 현장에 출동해 범죄인지 단순 가출인지 판단한다. 서씨는 회원들과 함께 50여개의 법 개정에 노력했다. 경찰청 산하에도 실종전담부서 182 신고센터가 생겼다.
이번 추석에 그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낼 것이라고 했다. 집에선 그도 막내다. 한 때 명절에 형의 집에 찾아가기도 했지만 어느 날부터 발길을 끊었다. "저는 가족들에게 불편한 존재예요. 희영이 생각을 가족들이 할 수밖에 없어서… 웃을 일이 있어도 제가 있으면 잘 웃기 어려운 거예요." 서씨는 고개를 숙였다.
김지은 기자 running7@mt.co.kr 남원(전북)=김미루 기자 miroo@mt.co.kr 남원(전북)=이강준 기자 Gjlee1013@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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