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규의 코칭 스토리] ‘빅독에서 언더독으로, 다시 빅독으로’ 홍대부고 이무진 코치
[점프볼=조원규 칼럼니스트]
‘코칭의 시대’라고 합니다. 코칭은 스포츠에서 나왔습니다. 아마농구 10년 이상 혹은 한 팀에서 5년 이상 선수들을 지도한 코치를 찾아 코칭의 철학과 노하우를 들었습니다.
이무진 코치는 2000년 홍대부고에 부임했습니다. 24년이 지난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현역 아마농구 지도자 중 가장 오랜 기간 같은 팀을 지도했습니다. 코치가 적성에 맞을 것 같아 시작했고, 특별한 날이면 잊지 않고 찾아와주는 제자들로 인해 힘을 얻습니다.
홍대부고 농구부 최초의 전성기는 1990년입니다. 이무진은 이상민, 노기석과 함께 ‘홍대부고 3인방’으로 불리며 모교를 전국대회 3관왕으로 이끌었습니다. 대통령기 결승에서 김병철의 용산고에게 졌지만, 이무진은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팀에 꼭 필요한 선수였습니다.
컴퓨터 가드 이상민은 연세대로 진학했습니다. 노기석은 고려대로 진학했습니다. 이무진은 동기들과 홍익대로 향했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팀입니다. 지금은 해체된, 기록으로만 남은 팀입니다. 이무진은 몇 안 되는 홍익대 출신 프로선수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 빅독에서 언더독으로
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습니다. 입학 제의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는 혼자 진학해야 했습니다. 동기들이 갈 곳이 없었습니다. 이무진은 동기들과 동반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예선 통과도 버거운 전력에서 골밑까지 지켜야 하는 올어라운드 플레이어로 고군분투했습니다. 동기 이상민, 노기석과 비교하면 초라한 대학 생활입니다.
졸업 후 힘들게 프로에 입성했지만 기회가 많지 않았고, 그때부터 코치 이무진으로 변신을 준비했습니다. 마침 모교에 코치 자리가 나왔습니다. 망설임 없이 옛 스승을 찾아가 코치를 자원했습니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코치가 적성에 맞을 것 같았습니다.
“골드뱅크와 계약 기간이 2년 남았어요. 내가 있다고 4강 팀이 우승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왔습니다. 솔직히 제 존재감이 미미했거든요(웃음).”
※ 광주 골드뱅크는 여수 코리아텐더, 부산 KTF를 거쳐 지금의 수원 KT가 되었습니다.
홍익대를 다닐 때부터 남는 시간에 후배들의 훈련을 도왔습니다. 어린 후배들과 같이 운동하고 가르치는 것이 좋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지도자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프로에서 감독님들이 패턴을 지시하면 그림을 그리고 메모를 했습니다. 은퇴 후 지도자가 되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막상 코치가 되니 선배의 위치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책임감 없이 하루 이틀 후배들을 봐주는 것과 저에게 미래를 맡긴 제자들을 대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습니다.
당시 홍대부고 전력이 약했습니다. 성적이 나와야 선수들의 미래도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건도 나빴습니다. 체육관이 없어 이곳저곳 훈련을 위해 떠돌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지는 것은 싫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을 강하게 훈련시켰습니다.
“제가 승부욕이 좀 강하죠. 연습경기를 해도 지는 건 싫습니다. 연습경기도 실전처럼 1점이라도 이겨야 해요. 1승, 1승 쌓이면 그것이 성적이 되니까…. 선수들에게 강하게 했습니다. 제가 좀 강성이기도 하고,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부임 1년 만에 추계연맹전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96년 협회장기 이후 5년 만의 전국대회 우승입니다. 추계연맹전은 31년 만의 첫 우승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15개의 학교가 우승했지만 홍대부고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우승 이후 체육관 건립이 시작됐고, 2004년 드디어 학교 내 전용 체육관이 생겼습니다.
체육관이 생긴 후 우승 횟수가 많아졌습니다. 임동섭, 정희재(이상 고양 소노), 이대혁(전 안양 KGC) 등 우수 선수들이 모이며 2007년 종별선수권, 2008년 대통령기 우승컵을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꾸준히 전국대회 4강권 안에 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서울은 경복, 용산, 휘문이잖아요. 우리도 그 안에 들어가자. 그것이 목표였어요. 여전히 연습경기도 선수들이 집중 못 하면 말을 많이 합니다. 올해는 목이 많이 아파요. 그래도 잘 따라오는 선수들은 크게 얘기를 안 합니다. 박무빈 때가 그랬어요. 그 선수들과 같이 할 때는 목이 안 아팠어요(웃음).”
▲ 그때는 목이 안 아팠어요
올해 홍대부고는 전국대회 우승 1회, 준우승 1회의 준수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이 코치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집중력을 높였다면 더 좋은 성적이 가능했습니다. 내년 주축이 될 2학년들이 더 큰 자신감으로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즌 내내 목소리가 컸습니다.
홍대부고는 2019년에도 3관왕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주축 선수가 박무빈(울산 모비스), 고찬혁(수원 KT), 나성호(안양 정관장) 등입니다. 이 선수들에게는 크게 호통을 칠 일이 없었다고 이 코치는 말합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박무빈의 기억은 조금 달랐습니다. “아마 코치님이 시간이 좀 지나서 기억을 못 하시는 것 같아요. 저도 호통을 많이 들었을 때가 있었습니다”라며 웃었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1학년 마지막 시점부터 2학년 첫 대회 전까지는 정말 많이 혼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적게 혼나고 짧게 혼났던 것 같기는 하지만, 짧다면 짧은 기간에 정말 크게 자주 혼났던 것 같다”라고 합니다. 이 코치의 주문은 중학교 티를 벗으라는 것입니다. 1대5 농구가 5대5 농구를 하라는 것입니다.
박무빈은 이 코치의 호통이 “더 강하고, 더 밀리지 않게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라며 “그래서 고등학교 무대에 더 잘 적응하고 제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고교 무대에 잘 적응한 박무빈은 최강 고려대의 주장을 거쳐 국가대표에 발탁됐습니다.
박무빈은 이무진의 지도 스타일을 “강함 속의 부드러움”이라고 표현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목표나 중요한 부분들만 가르쳐주시는 것 같지만 점점 지낼수록 세심한 부분들도 채워주셔서 나중에 생각해보면 딱히 부족한 부분 없이 배웠다”라며 ”재학 중에는 무서울지 모르지만, 졸업 이후 찾아갔을 때는 대가 없이 사랑을 주신다“고 부연했습니다.
박무빈이 3학년이던 2019년 왕중왕전 결승. 박무빈은 이두원이 버틴 휘문고를 상대로 후반에만 24득점을 폭격했습니다. 홍대부고는 이 경기를 71-61로 이겼고, 박무빈은 42득점에 9리바운드 5어시스트 4스틸을 더했습니다. 득점 본능이 강했던 박무빈은 수비와 리바운드, 패스 등 농구를 잘하는 선수로 변신하고 있었습니다.
▲ 언더독에서 빅독으로
이 코치가 부임했을 때 홍대부고는 언더독이었습니다. 지금의 홍대부고는 언더독이 아닙니다. 이 코치의 목표대로 꾸준히 4강권에 오르는 팀입니다. 우승도 낮설지 않은 팀입니다. 그런 팀을 만들기 위해 선수들을 강하게 다그쳤습니다. 29살의 젊은 코치는 자신이 배운 대로 지도했습니다.
시간이 쌓이면서 깨우친 것이 있습니다. 100명이면 100명, 선수들은 모두 다르다는 점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100명을 대하면 안 됩니다. 선수에 따라 지도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고 경기 중 역할을 조정해야 합니다. 홍대부고가 빅독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농구선수로 성공한 제자들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 대부분의 선수들이 특별한 날이면 이 코치를 찾습니다. 이번 추석에도 이 코치를 찾은 제자들이 있습니다. 스승의 날에는 세 그룹으로 시간을 조율하여 찾아옵니다. 이 코치는 그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고 얘기합니다.
농구선수로는 성공하지 못한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안정된 사업체를 꾸려가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 유통회사에 다니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운동했던 경험을 살려 재활에 도움을 주거나 유소년을 지도하는 제자들도 많습니다. 그들도 스승의 날에 이 코치를 찾습니다.
농구 코치 이무진은 선수들을 강하게 다그칩니다. 인생 선배 이무진은 따뜻한 멘토입니다. 모두가 농구로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본인이 직접 경험했습니다. 강하게 다그칠 선수가 있습니다. 부드럽게 어루만질 제자가 있습니다. 사람이 다르면 코칭의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박무빈은 “선수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을 더 잘 키우고 더 잘 돋보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이 코치의 장점이라고 얘기합니다. 동기부여의 방식이 ‘코칭’의 본래 의미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고한 목표와 동기부여는 코칭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고, 이 코치는 이를 통해 강한 팀을 만들었습니다.
홍대부고의 전력은 오랜 기간 상위권에 있습니다. 임동섭, 정희재, 강상재, 박지원, 박무빈 등 꾸준히 프로선수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이 코치는 홍대부고에서 이룰 것은 다 이뤘다고 얘기합니다. 이제는 “고등학교 3년,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부모의 마음으로 선수를 키워서 내보낸다”고 얘기합니다.
▲ 아들 가진 부모의 마음으로
홍대부고 선수 이무진은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없었습니다. 홍대부고 코치 이무진은 제자들 모두를 원하는 대학에 보내고 싶습니다. 물론 불가능합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루소는 “선생은 가르치는 것이 아닌, 배우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진학에 필요한 실력을 갖추는 것이 우선입니다.
대학과 연습경기는 일종의 쇼케이스입니다. 우리 선수를 알리는 홍보의 장입니다. 홍대부고는 매년 많은 대학과 연습경기를 합니다. 그 경기를 통해 대학 감독들이 홍대부고 선수들을 눈여겨봅니다. 그 정보는 “학부모에게 100% 오픈”한다고 합니다. 정보의 부재나 왜곡으로 인한 피해는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성적은 높은 진학률을 만들었고,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어 꾸준히 좋은 성적이 나오는 선순환을 만들었습니다. 이 코치가 이룰 것은 다 이룬 것 같다고 얘기하는 이유입니다.
빅독에서 언더독으로, 다시 빅독으로…. 이무진의 농구 인생에는 스토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직 스토리 전개를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아직 키우고 싶은 선수가 많습니다. 남자와 여자, 성인과 학생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늘 새로운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조원규_점프볼 칼럼니스트 chowk87@naver.com
#사진_점프볼DB, 이무진 코치 제공
Copyright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