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샤라포바&비너스…팬과 함께 맞은 성년 코리아오픈 테니스

김종석 2024. 9. 17.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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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 WTA 500으로 승격된 하나은행 코리아오픈에서 1,2세트 모두 타이브레이크 끝에 승리한 엠마 라두카누. 20회째를 맞은 이번 대회는 참가 선수의 수준 높은 플레이와 관전 매너로 호평을 받고 있다. 코리아오픈 조직위원회 제공

스무 살을 흔히 ‘약관(弱冠)’이라고 합니다. 갓을 쓰는 나이, 즉 성인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국내 유일의 여자 프로테니스(WTA)투어 하나은행(은행장 이승열) 코리아오픈이 올해로 20회째를 맞았습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세월 동안 국내 무대를 지키며 어느덧 테니스 대회로 성인이 됐습니다. 이번 대회는 14일 개막해 22일까지 서울 올림픽공원 테니스경기장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2004년 제1회 대회부터 현장을 지켜본 필자의 감회도 남다릅니다. 당시 두 돌이 채 되지 않았던 필자의 딸은 대학생으로 성장했고, 태어나지도 않았던 둘째 딸 역시 올해 대학에 입학한 걸 보면 세월이 참 빠른 것 같습니다.

●샤라포바로 시작해 샤라포바로 끝난 원년 코리아오픈

20년 전 이맘때를 되돌아보면 코리아오픈은 첫판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러시아 뷰티’ 마리아 샤라포바로 시작해 샤라포바로 끝난 대회였죠. 10대 윔블던 챔피언이라는 화려한 경력과 미모까지 겸비한 샤라포바는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쉬는 날 인기 예능 ‘무한도전’에 출연한 샤라포바의 녹화 현장을 취재할 만큼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샤라포바의 아버지 유리 샤라포바까지 뉴스에 등장할 정도였죠. 대회 기간 총 2만7000여 명의 관중이 몰려들어 흥행 대박을 누렸습니다. 물론 원년 챔피언의 영광도 샤라포바에게 돌아갔죠. 

샤라포바의 효과가 워낙 거셌기 때문이었을까요. 코리아오픈은 스타 마케팅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06년에는 ‘알프스 소녀’ 마르티나 힝기스가 출전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2007년에는 비너스 윌리엄스가 뛰어난 매너와 함께 정상에 올라 한복 차림에 청자 트로피를 안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2009년에는 다테 기미코가 39세 7개월의 나이로 우승하며 노장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사진> 2004년 제1회 코리아오픈에서 우승한 마리아 샤라포바. 테니스코리아

2017년 우승자 엘레나 오스타펜코, 지난해 우승 도자기를 차지한 제시카 페굴라 등도 기억에 남습니다. 

새로운 이정표가 될 스무 번째 대회는 WTA 250에서 한 단계 높은 500으로 승급돼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게다가 세계 랭킹 1위 이가 시비옹테크(폴란드)와 US 오픈 준우승자이자 한국계 제시카 페굴라(3위·미국), 2022년 윔블던 우승자 엘레나 리바키나(4위·카자흐스탄), 올해 US오픈 4강에 오른 에마 나바로(8위·미국) 등 톱10 선수 4명이 출전 신청을 해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하지만 네 명 모두 결국은 올림픽 코트를 밟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부상으로 대회를 포기했고 나바로는 일정을 변경했습니다. 못 뛴 건지, 안 뛴 건지에 대한 의구심이 일기도 했습니다. 실망한 팬들의 항의가 SNS를 타고 번지기도 했습니다. 

올림픽 테니스경기장 센터코트 외벽에 걸린 대형 대회 포스터에 사진이 내걸린 4명의 특급 선수 가운데 3명이 불참한 가운데 2021년 US오픈 우승자 엠마 라두카두(영국)만이 외롭게 출전자로 남았더군요, 라두카누는 17일 경기에서 미국의 페이튼 스턴스를 2시간 49분 동안 1,2세트 모두 타이브레이크 접전을 치른 끝에 이겼습니다. 이 경기를 지켜본 대회 관계자들은 라두카누의 짜릿한 승리에 가슴을 쓸어내리더군요.


<사진> 올림픽코트 외벽에 내걸린 2024 대회 홍보 현수막

●한가위 테니스 큰 잔치…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그렇다고 맥 빠진 잔치는 아니었습니다. 추석 연휴 기간 찾은 코리아오픈 현장에는 코트 안팎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명절을 맞아 가족 단위 관람객은 코트 밖에 설치된 다양한 협찬기업 홍보존에서 색다른 이벤트를 체험하며 나들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 공식 의류, 신발 등과 사용구 후원 업체인 윌슨은 마치 민속촌 같은 한옥마을을 조성하고 제기차기 등으로 관람객들에게 풍성한 선물을 증정하고 있었습니다. 한 외국인 관람객은 “테니스도 보고 한국의 민속놀이도 즐길 수 있어 너무 재밌었다”라며 연방 기념 사진을 찍더군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요. 세계적인 식음료 제공 업체인 아라마크는 경기장 곳곳에 푸드존을 설치해 관람객에게 다채로운 메뉴를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식사 도중에도 경기 상황을 지켜볼 수 있도록 대형 전광판까지 설치해 음식과 함께 선수들의 수준 높은 플레이를 감사할 수 있도록 세심한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이런 풍경은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의 서비스더군요.

대회 공식 차량인 기아차는 선수들의 ‘발’ 노릇을 자처하며 편안한 이동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전기차 체험 공간을 통해 관람객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주고 있습니다.



<사진> 코리아오픈 테니스대회 기간 열리고 있는 각종 이벤트 풍경. 김종석 제공

●테니스 관람 문화 선진화 기여

다시 2000년대 초반 코리아오픈 시절로 돌아가 볼까요. 당시 테니스 기사의 단골 메뉴는 관전 매너였습니다. 플레이 도중에는 정숙이 요구되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관람객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자리 이동은 코트 체인지 때에만 허용되는 데도 시도 때도 없이 객석을 오가는 일부 볼썽사나운 팬들을 제지하느라 운영요원들은 진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입장권 민원 또는 공짜 티켓 요구에 대회 관계자들은 아예 휴대전화를 꺼놔야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민망한 장면들은 거의 사라졌다는 게 대회 관계자들의 설명입니다. 20년 동안 대회를 치르는 동안 수준 높고 품격 있는 관전 매너가 자리를 잡게 된 것도 코리아오픈의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국내에서 테니스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줄기는 연령층이 2030 청년층으로 확대됐습니다. 코리아오픈 출범 당시부터 산파 역할을 맡았던 주원홍 대회 공동 조직위원장은 “테니스가 갖고 있는 매력과 운동 효과 때문일 것이다”라며 “이렇게 좋은 테니스를 널리 알리는 데 이 대회가 한몫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번 대회는 WTA 500시리즈로 승격돼 처음 치르고 있습니다. 총상금도 100만 달러에 이르고 관중석 1000석 이상 규모의 코트가 3개 이상 돼야 하는 등 500시리즈가 요구하는 다양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관중 수도 중요합니다.

톱 선수 불참 러시로 관중 동원에도 적신호가 켜졌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20년을 꼭 채우도록 코리아오픈이 롱런하게 된 것은 최고 주역은 어쩜 테니스장을 찾고, 테니스 중계를 지켜본 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WTA 500도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기대했던 선수들을 직접 볼 수는 없게 됐지만 세계 50위 이내 선수의 기량은 백지 한 장 차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그들이 펼치는 폭발적인 서브와 스트로크, 절묘한 드롭샷 등은 박수갈채로도 부족할 만합니다.


<사진> 올림픽공원 테니스경기장 모습. 테니스 코리아 제공

●무늬만 500시리즈…공단 관리 코트 시설 개선 절실

다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고 했듯 WTA 500이라는 가슴 뿌듯한 타이틀에 걸맞지 않은 모습도 있어 안타깝기도 합니다. 주원홍 공동 조직위원장은 웰컴 파티에서 “부족한 부분은 이해를 바란다”라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20년 동안 대회를 이끈 이진수 토너먼트 디렉터(TD)는 “WTA 500 대회를 치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시설과 기준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올림픽공원 테니스코트가 그렇지를 못하다”라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관중석을 갖춘 쇼 코트도 주최측 부담으로 만들어야 했다는군요. 이진수 TD는 또 “(올림픽 코트 관리 주체인) 국민체육진흥공단(이사장 조현재)이 좀더 시설 보완에 중점을 구했으면 한다”라는 바람을 전하더군요.

실제로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할 의무실은 냉방도 안 되는 사무실에 설치돼 있었습니다. 이상 고온 현상으로 17일에는 최고 기온이 35도를 넘나들면서 경기 시작이 지연되거나 일사병을 호소하며 기권하는 선수도 나왔습니다. 선수들의 건강에 위협을 준다면 국제적인 망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외신 기자들이 대회의 생생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자실에도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아 선풍기 3대로 겨우 열기를 식히고 있었습니다. 한 외신 기자는 “그나마 1대였다가 2대가 추가된 거”라면서 씁쓸한 미소를 보이더군요.

한 관중은 “10만 원 넘는 티켓을 주고 경기를 보러 왔는데 화장실에 휴지도 없더라. 경기장 관리는 누가 하는 것이냐?”라며 분통을 터뜨리더군요. 

WTA 500 대회를 처음 개최하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아 보입니다. 특히 해마다 지적된 경기장 시설은 여전히 낯 뜨거울 정도로 낙후돼 있어 개선이 시급해 보입니다. 대회 주최측과 스폰서, 국민체육진흥공단 등의 협업이 절실해 보입니다. 

톱스타 직관을 기대하며 표를 샀던 팬들의 허탈한 마음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내년 대회 티켓 구입할 때 우선권을 준다거나 할인이나 기념품 증정 등 혜택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신규 고객 유치보다 더 중요한 건 충성도 높은 기존 고객 유지일 겁니다.


<사진> 한국 선수로는 코리아오픈 최고 성적을 거둔 장수정. 테니스 코리아 제공

●여전히 높기만 한 세계 테니스 벽

한국 테니스의 국제경쟁력이 지난 20년 동안 답보 또는 퇴보했다는 사실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해외에서도 찬사를 받는 이런 훌륭한 대회를 해마다 치르고 있으면서도 정작 한국 선수들은 초반 탈락의 비운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국내 선수의 단식 최고 성적은 2013년 장수정이 기록한 8강입니다. 복식에서는 전미라-조윤정, 한나래-최지희가 정상에 선 적이 있지만 테니스의 꽃은 역시 단식 아닌가요. 

코리아오픈 때마다 늘 한국 테니스 경기력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선수 육성의 중심에 있는 대한테니스협회는 지난 8년 동안 집행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오히려 뒷걸음질을 자초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최근에는 테니스 발전에 헌신할 만한 역량을 갖췄다는 평판을 듣는 주원홍 조직위원장이 대한테니스협회장으로 선출됐는데도 대한체육회(회장 이기흥)가 되레 관리단체 지정 등 여론에 역행하는 태클을 걸어 모처럼 찾아온 테니스 붐의 기회를 걷어차고 있다는 비판까지 듣고 있습니다. 대한체육회 관리 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도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올바른 정책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1990년 국내에서 열리던 남자 프로테니스(ATP)투어 KAL 컵은 관중 부족 등의 이유로 개최가 중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20년 전 4등급 대회로 출발한 코리아오픈은 이제 당당히 WTA 500시리즈 대회로 올라섰습니다. 앞으로도 그 위상을 드높이며 장수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무엇보다 팬들의 사랑이 그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물론 대회 관계자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도 ‘팬 퍼스트’ 정신이 박혀 있어야겠지요.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글= 김종석 기자(tennis@tenn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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