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고 또 죽이는···전쟁 속 텔레그램의 두 얼굴
하마스는 텔레그램으로 인질 동영상 공개 ‘압박’
텔레그램이 익명성을 앞세워 마약 범죄와 딥페이크 등 유해 콘텐츠의 온상으로 지탄받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하마스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는 때로는 생명을 구하는 동아줄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전쟁 프로파간다와 공격 정보가 오가는 잔인한 채널로도 작용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 최전선 마을 쿠라호브에 사는 이나는 텔레그램 채널인 ‘쿠라호브 롤콜’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피란을 떠나지 않은 그는 마을에 남아 케이크, 파이, 피자 등을 만든다. 이나는 알자지라 방송과 인터뷰에서 그가 만든 파이는 텔레그램을 통해 병원 등지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텔레그램은 의약품 재고 상황이나 공습경보 같은 정보를 주고받는 채널이다.
쿠라호브 지역은 러시아 포격으로 부상자 발생, 주택가 파손이 이어지고 있다. 쿠라호브에 남아있는 주민들은 나이가 많거나 장애가 있거나, 혹은 장애가 있는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이들이다. 67세 어머니와 5층짜리 아파트 건물에서 사는 제빵사 이나는 “떠날 수가 없다”면서 “모든 곳에서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수시로 지하실로 내려가 러시아 공습을 피하며 버티고 있다. 또 다른 주민은 “농장에 남은 소 때문에 마을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알자지라 방송은 “텔레그램이 유럽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끝자락에서 살아남은 민간인들에게 생명줄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 상황에서는 익명성이 핵심”이라고 했다. 익명성을 내세운 텔레그램이 전쟁 속에서도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민간인들에게 필수품이 된 것이다.
그러나 텔레그램은 전장에서도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텔레그램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군 당국의 공식 소통 채널로 사용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전황 등 주요 발표를 텔레그램을 통해서 하고 있다. 잔혹한 전쟁 프로파간다(선전)도 텔레그램을 거친다.
특히 지난 1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에 의해 이스라엘 인질 6명이 사망한 채 발견된 후 하마스는 2일부터 닷새에 걸쳐 인질들의 생전 모습을 텔레그램 채널로 공개했다. 가자지구에는 하마스가 지난해 10월7일 이스라엘 기습 공격 당시 끌고 간 251명 중 97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휴전 합의를 압박하려는 의도다. 앞서 지난해 10월7일 당시 학살 장면도 텔레그램에 공개한 바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의 침공을 정당화하는 등 각종 허위 정보를 뿌리는 데 이용된다. 러시아군 자체로도 텔레그램 의존이 상당하다.
미 월스트리스저널(WSJ)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부터 보안이 되지 않는 통신 시스템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러시아 군인과 군부대들이 전술 조율에 텔레그램을 활용한다. 러시아군에 드론, 야시경, 차량 등 군사물자를 지원하는 자원봉사자들은 거의 전적으로 텔레그램에 의존한다. 일각에서는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최고경영자(CEO)의 체포와 연결 짓기도 한다. 두로프가 협력할 경우 러시아 정보기관들이 치명적 피해를 볼 수 있어 러시아가 긴장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두로프는 지난달 말 프랑스 공항에서 검찰에 체포돼 텔레그램 내 아동 음란물 유포와 마약 밀매, 조직적 사기 및 자금 세탁 등을 방치해 사실상 이를 공모하고 수사 당국의 정보 제공 요구에 불응한 혐의 등으로 예비 기소됐다. 이후 보석금 500만유로(약 74억원)를 내고 석방됐지만, 출국은 금지됐다. 두로프는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매주 두 차례씩 경찰에 출석해야 한다.
두로프는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텔레그램이 ‘무법천국(anarchic paradise)’이라는 의혹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며 감독 부족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인지하고 있고 범죄행위에 대한 관리를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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