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데뷔 45주년' 천상두 디자이너…'여자 지성'에 꽂혀 탄생한 '이노센스'
한땀한땀 돋보기로, 평범하지만 고급기술 ‘유행없는 패턴 고집’
40년전 엄앵란 극찬·계은숙 초대 첫 일본행이 커리어 전환기
[더팩트ㅣ대구=최대억 기자] "단 한번도 옷감의 소재, 색감, 선 등 외형적인 측면을 먼저 떠올린 적이 없습니다. 하얀 백지에 오로지 ‘여자의 인격’을 상상한 뒤 드로잉을 거듭하다보니 그 도안이 옷으로 연결된 겁니다."
대구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 천상두(70)는 올해로 데뷔 45주년을 맞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탄생시킨 여성복 브랜드 ‘이노센스(INNOCENCE)’의 비밀병기를 처음으로 털어놨다.
천상두 디자이너는 16일 <더팩트>와의 인터뷰에서 "인격은 국어사전에서 ‘사람으로서 품격’으로 정의하는데, 저는 나아가 ‘여자만의 품격’을 제 작품에 녹여내고 싶었다"며 "사랑스럽고 로맨틱한, 그러면서도 유행없는 모드를 품은 ‘여자의 인격’ ‘지성’을 작품에 투영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 특유의 품격을 비의식 수준에서 인지하며 암묵적으로 처리되는 현상인 ‘식역하 지각’ 형태의 디자인에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식역하 지각을 이용한 디자인 사례로는 1990년대 ‘참이슬’ 소주 BI를 제작한 손혜원 대표(크로스포인트)가 초기 소주병에 붙힌 상표에서 휘어진 대나무를 그려 ‘부드러움’을 의식적으로 인지되지는 않지만 구매 행동에 영향을 준 형태를 꼽을 수 있다.
이보다 훨씬 전인 1970년대에 천상두는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등용하는 시험에서 인물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던 네 가지를 이르는 몸·말씨·글씨·판단, 즉 ‘신언서판(身言書判)’가운데 사람의 풍채와 용모를 뜻하는 ‘몸(身)’에 대해 유년 시절부터 유달리 집착했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을 처음 대했을 때 첫째 평가 기준은 아무리 신분이 높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첫눈에 풍채와 용모가 뛰어나지 못했을 경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기 쉽다"며 "특히 여성의 경우 성경(잠언)에서는 ‘현숙한 여인은 검약을 실천하고 부지런히 가정 경제를 꾸리는 동시에 자신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의복을 입을 줄 안다’는 언급이 있고, 영국 속담에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 이를 패션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도 애써 재단하고 봉제한 창작 옷을 절친한 친구로부터 천박한 대우를 받아 망신당한 날이 의상 제작에 ‘목표와 계획’을 세운 후 ‘예외를 두지 않고 실행’에 옮기며 훗날 시나브로 성장한 계기였다고 털어놨다.
◇16살 '첫 작품'에 친구 놀림, 곱씹다 디자이너 '터닝 포인트'
1970년 고향인 경북 의성군에서 16살 때 평범한 긴 청바지에 실증나 반바지로 재단한 뒤 먼지털이에서 떼어낸 반짝이를 붙여 공들여 박음질한 옷을 폼나게 차려입고 친구한테 자랑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친구에게 ‘말광대 같다’는 놀림을 받았다.
그것도 친구의 단 ‘0.1초’만의 반응 속도에 상처받았던 그는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울며 옷을 다 찢어 버렸다.
그러나 이날의 기억이 천상두에겐 몸을 감싸는 옷에 대해 ‘도구’ ‘표현’뿐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에 한참을 고민하며 군 제대 후 25살이 되던 해 ‘미스터천’이라는 간판을 내건 옷 가게 오픈(대구 비산동 옛 오스카극장 옆)과 더불어 독학으로 가봉에서 패턴 제작, 봉제에 이르기까지 본격적으로 맞춤복 시장에 뛰어든 ‘터닝포인트’였다.
천상두는 "중학교 때 그 친구의 비웃음을 두고두고 곱씹다 26년이 지난 1996년 첫 개인 패션쇼(대구 프린스호텔)에 그를 초대했던 날, ‘미안하다. 의성군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이 천상두’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섭섭함이 사라졌고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며 "지금도 이 친구와 연락하고 지낸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1984년 대구백화점 맞은편(한미약국 옆)에서 개업한 유니섹스 스타일 패션 매장을 개업했을 땐 낚시줄을 이용해 직접 만든 허수아비 형태의 공중에 뜬 마네킹을 대구시내에서 최초로 선보인 적이 있다"면서 "다들 정신 나갔다고 나를 무시했을 당시 배우 엄앵란 씨가 제 쇼윈도를 극찬하며 옷을 구매하고 격려해 준 것도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일본 거주 중인 가수 계은숙 씨 생일에 초대받아 배우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하용수 씨 등 일행과 일본을 첫 방문했을 때 도쿄의 백화점에서 본 아르마니 등 이태리 브랜드와 각종 명품 옷을 난생 처음 접하며 5분여간 경직된 적이 있었다"며 "한국으로 돌아와 당시 23만 엔(230만 원, 현재 시세 2000만 원 상당)을 주고 산 옷을 분해해서 봉제 한 땀 한 땀을 돋보기로 관찰하며 패턴을 분석했던 과정 등에서 많은 학습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 시기가 비전공자 디자이너였던 그가 옷 제작자에서 평생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기본기와 마음을 고쳐먹고 스스로에 엄격해지는 커리어 전환점이었다고 한다.
◇고운시절 어머니·별·대중모습서 ‘숨겨진 지적 품위' 영감
천상두는 우리가 종종 경외감을 느끼는 ‘평범하지만 고급기술’이 만들어낸 ‘장인’의 고집으로 상품 퀄리티를 유지, 트렌드 변화에 맞는 상품 개발을 지속하면서도 유행의 흐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지금의 패션을 정착시켰다.
그는 "옷은 자신이 봤을 때 마음에 들어도 실제 타인이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면서 "극도로 무난하고 평범하면서도 한국인 체형에 맞고 ‘격’이 묻어나는 옷을 탐구하기 위해 지하철과 버스, 거리에서 만나는 대중의 일상복과 패션전문지, 해외 명품들간의 디자인을 비교 분석·접목하며 20~40년이 더 지나도 유행을 타지 않는 ‘질리지 않고 숨겨진 지적인 품위’가 가미된 트랜드에 영감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또 "소년 시절 시골마을 대청마루에 누워 바라본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과 어우러진 광활한 우주 공간을 보며 내 눈에만 그려졌던 여러 영감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조용한 성품의 교사였던 아버지를 내조하며 마을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미인이셨던 고운 어머니의 자태와 지적인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 당장이라도 새 패턴이 떠오른다"고 부연했다.
그래서 탄생한 천상두 디자이너의 ‘이노센스’는 사랑스럽고 로맨틱한 모드를 콘셉트로 화이트-블랙, 네이비, 베이직, 그레이 등의 색상으로 도시 여성의 절제된 세련미와 성숙한 여인의 우아함을 매칭시켜 ‘격(格)’을 살포시 드러낸 그만의 차별화된 의상이 돋보인다.
그의 노력은 미국 독립기념 초청 패션쇼, 프랑스 후즈넥스트, 중국 대련패션쇼, 상하이패션쇼, 칭다오패션쇼뿐만 아니라 난치병 어린이돕기 패션쇼와 불우이웃돕기 패션쇼 등에서 여러 업적을 남겼다.
장정옥 대구 향토 작가(소설가)는 천상두에 대해 "패션쇼가 45주년을 맞도록 아직도 옷 만들기에 전념할 수 있는 걸 보면, 옷은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할 운명인 게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아침에 출근하면 해가 질 때까지 의상실에서 옷 만들며 하루를 보내는 게 일상인 그는 먹고 자고 옷 만드는 게 전부인 사람! 고희를 맞은 지금이야말로 자기만의 특색있는 옷을 만들 시기가 온 것 같다고 한다"며 "여느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패션 디자이너 역시 자기 작품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본지에 전했다.
천상두는 오는 11월 1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디너패션쇼에 이어 15일 한국패션센터 2층(대구엑스코 앞)에서 ‘45주년 기념 천상두 패션쇼(가칭)’를 개최를 앞두고 새 아이디어 발굴을 위해 지나온 자신의 패션 패턴을 톺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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