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들, 판결문 계속 길고 어렵게 쓰실 건가요?

이근아 2024. 9. 1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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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은 왜 '만연체의 끝판왕'이 됐나]
한 문장 300자, 총 3,000장 넘는 판결문도
"당사자가 아니라 상급심 보고 쓰기 때문"
일선 법원에선 쉽고 간략하게 쓰기 움직임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를 하기 위해 자리해 있다. 뉴스1

<채무자가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데도 채권자가 채무자를 대위하여 채무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려면 그러한 채무자의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채권자의 권리를 보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보전의 필요성은 채권자가 보전하려는 권리의 내용, 채권자가 보전하려는 권리가 금전채권인 경우 채무자의 자력 유무, 채권자가 보전하려는 권리와 대위하여 행사하려는 권리의 관련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채권자가 채무자의 권리를 대위하여 행사하지 않으면 자기 채권의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게 될 위험이 있어 채무자의 권리를 대위하여 행사하는 것이 자기 채권의 현실적 이행을 유효·적절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지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고, 채권자대위권의 행사가 채무자의 자유로운 재산관리행위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 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보전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기사 시작부터 머리가 아프시죠? 수많은 재판에 들어가 보고 평소 판결문을 열심히 읽는다고 자부하는 법원 출입기자도 도무지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위 문단은 2020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2018다879)에서 발췌했습니다. 심지어 판결문 본문도 아니고, 알기 쉽도록(?) 전체 내용을 요약한 판결 요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대위행사나 보전의 필요성 등 법조인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지만, 꼭 이렇게 썼어야만 했을까요? 문장 하나가 무려 336자에 달합니다.


길다, 길어도 너무 길다

흔히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 합니다. 중앙부처나 검찰과 달리, 법관들은 판결 후 출입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하거나 판결 취지를 따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종종 설명자료를 배포하는 친절한 재판부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판결문은 법관이 재판 당사자 및 국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매개입니다.

하지만 비법조인에겐 여전히 판결문은 어렵고 깁니다. 쟁점이 복잡하고, 다툴 내용이 많은 사건이긴 했지만 최근엔 3,000쪽을 거뜬히 넘긴('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1심 판결문까지 나왔습니다. 이 판결문 역시 한 문장이 다섯 줄을 넘거나 '~하는 바' '~하였는데' 등의 표현으로 이어져, 마침표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법관들은 이렇게 판결문을 쓰는 걸까요.

게티이미지뱅크

사법부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습니다. 1998년 8월 '판결서 작성 방식에 관한 권장사항' 예규를 제정하고, 2007년 간이화한 판결문을 법원 내부망에 자발적으로 등록하도록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2013년까지 6년간 쌓인 판결문은 189개에 불과했어요. 2010년, 2015년 사례집 발간 등 노력이 이어졌지만, 정착되진 않았다고 합니다.

일선 법관들에게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꼽더군요. ①각 기관장(법원장)의 의지 부족각 재판부의 부장판사 ③그리고 상급심입니다. 한 마디로 결국 법원 내부 인식과 문화가 걸림돌이란 뜻이겠습니다. 수도권 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하급심 판사들은 상급심에 판결문을 보여주기 위해, 배석판사 입장에선 부장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생략할 수 있는 부분도 구체적으로 적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상급심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큽니다. 1심이 판결문을 쉽게 쓰면 이후 상급법원으로부터 "불성실하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는 걱정이 있다는 겁니다.

지난해 말 발간된 사법정책연구원 보고서에서 한 경력법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결은 당사자가 주장한 것에 대한 답을 주는 거지, 항소심에게 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란 공감대가 전체 법관에 형성돼야 할 것 같다"고요.


총력전 나선 법원행정처

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이젠 법원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자꾸 커지고 있습니다. △법관의 과도한 업무에도 늘지 않고 있는 법관 수 △법조일원화 및 평생법관제 정착으로 법관 평균 연령 증가 등 현실적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법원행정처는 올 4월 쟁점이 간단하고 정형적 사건이 많은 민사·가사 중액 단독, 소액 사건과 그 항소심 사건에서 판결서 적정화를 실시할 재판부를 모집했습니다. 100여 개 재판부가 참여를 희망했고 행정처는 6월부터 지금까지 해당 재판부들이 작성한 판결문들을 모았습니다.

청구원인을 두고 양측 간 다툼이 없는 사건에서 '청구의 표시'를 별지 첨부하는 방식으로 작성하거나, 글 앞에 번호를 붙여 가며 중요한 요점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쓴 판결문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르면 다음해 초까지 다양한 판결을 쌓아 사건유형별 모델들을 공유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네요.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각 재판부에서 시도하는 창의적인 간이화 판결문을 적극 공유하면, 자연스럽게 법관들의 인식도 바뀔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쉬운 판결문을 쓰려는 법관들은 서로 느낀 점도 활발히 공유하고 있습니다. 한 전담법관은 "당사자가 자기 법적 문제를 토로하며 상의하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이 해결안을 제시해 주는 경우 취하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 당사자들도 이해하기 편할 것"이라는 의견을 공유했습니다. 대법원 판례를 인용할 때도 '복사-붙여넣기'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도 제언했습니다. "복붙 내용이 길면 당사자가 우리 이야기는 별로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유였습니다.


맺음말 이용·쟁점만 간략히

일선에서도 노력은 이뤄지는 중입니다. 판결문에 각주를 적극 도입하고, 그래프나 표를 삽입하는 등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당사자들의 이해를 돕는 방법을 시도하는 재판부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 판결문 중
1. 처분의 경위
-2021년 9월부터 사망 직전까지 식품공장에서 볶음밥 생산 및 포장 업무에 종사함
-2022년 1월 작업 중 쓰러져 사망함

2. 이 사건 처분의 위법 여부
가. 참조 판례: 대법원 2022.1.13 선고 2021두38567판결 등
나. 판단
1) 아래의 인정사실을 종합하면, 고인의 이 사건 질병은 업무상 원인으로 인하여 발병하였거나 적어도 업무상 사유로 인하여 자연적인 경과 이상 유발되거나 악화되었다고 봄이 타당함. 따라서 망인의 사망과 업무 사이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음

법원 전체적으로 이런 노력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 서울행정법원입니다. 한 예로 이 법원 행정7부(부장 이주영)는 지난달 22일 사망 근로자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소송에서 4장짜리 판결문을 썼습니다. 판결문은 '인정할 수 있음' '판정할 수 있음' '가능성이 높음' 등의 맺음말을 이용해 간결한 문장들로 구성됐습니다. 참조 판례는 대법원 사건번호만 간략히 기재했습니다.

다만 판결문을 쉽게 쓴다는 게 대충 쓰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간결한 판결문이 패소한 당사자를 설득하지 못하는 부족한 결론이 되어선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법정책연구원 보고서를 집필한 정승연 순천지원 부장판사는 "모든 쟁점에 대한 간략한 답변이라는 점이 판결서 간이화 방향과 조화될 수 있는 포인트"라면서 "당사자가 다투는 쟁점을 빠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각 쟁점에 대한 답변 내용을 상세하게 기재할 필요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이근아 기자 ga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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