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에서 의원·각료로… 남재희 前 노동부 장관 별세
1979년 정계 입문… 1992년까지 4선 의원
YS정부 노동장관 맡아 노사관계 개선 기여
일간지 기자로 시작해 국회의원, 장관 등을 지내며 언론계와 정관계 양쪽에 모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16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술을 워낙 즐기고 또 잘했던 고인은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사건 등 술자리와 얽힌 일화도 많다.
1958년 한국일보 기자로 시작한 고인은 1962년 조선일보로 옮겨 편집부 기자, 정치부 차장, 문화부장, 정치부장, 편집부국장 등을 지냈다. 1972년에는 다시 서울신문으로 옮겨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1974년 중견 언론인들의 친목·연구 모임인 관훈클럽 총무도 맡았다.
박정희정부 시절 고인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가 중정 요원들과 갈등을 빚기 일쑤였고, 당시 서울 남산 기슭에 있던 중정 청사로 연행돼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조선일보 정치부장으로 일하며 중정부장 김형욱과 술 시합을 벌인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정권 실세들과 몇몇 일간지 정치부장들이 함께한 저녁 자리에서였다. 맥주 잔에 가득 따른 양주를 김형욱이 거침없이 한숨에 넘기자 고인은 “술 마시는 모습을 보면 실력을 알 수 있는데 내가 졌다”며 한 발 물러섰다. 이에 김형욱은 “부전승을 거뒀다”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1978년 고인은 여당인 공화당 공천을 받아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0·26 사건 후 전두환 장군 등 신군부가 정권을 잡고 5공화국을 세운 뒤로는 여당인 민정당으로 옮겨 11∼13대 국회의원에 내리 선출되면서 4선 중진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민정당·민주당·공화당의 3당 합당 직후인 1992년 실시된 14대 총선에선 낙선했고 이후 더는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고인이 민정당 국회의원이던 1986년 국회 국방위 회식 사건이 터졌다. 육군참모총장 등 육군 수뇌부가 국방위 소속 의원들을 접대하는 자리였는데, 야당 의원과 장성 간의 말다툼이 그만 ‘난투극’으로 비화했다. 당시 고인은 여당 소속 국방위원이었음에도 장성들을 질타했다가 되레 얼굴을 얻어 맞고 크게 다쳤다. 군사정권 시절 군인들이 국회의원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일로 육군 지휘부가 사과하고 몇몇 장성은 군복을 벗었다.
고인은 노동부를 이끄는 동안 노동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존 ‘근로자의 날’(3월10일)을 없애고 ‘노동절’(5월1일)을 부활시키는 방안을 추진했다. 다만 보수 진영에서 이의를 제기해 날짜는 5월1일로 하되 명칭은 계속 ‘근로자의 날’을 쓰기로 했다. 1994년 12월까지 약 1년간 노동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불법체류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서도 내국인 근로자와 동등하게 노동관계법을 적용토록 하는 등 유연한 정책을 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인 1995년 YS로부터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최근까지도 저술 활동을 열심히 해 ‘내가 뭣을 안다고’(2024), ‘시대의 조정자’(2023), ‘진보 열전’(2016), ‘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2014) 등 책을 펴냈다.
유족으로 부인 변문규씨와 딸 화숙·영숙·관숙·상숙씨, 사위 예종영·김동석씨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은 19일 오전 5시20분, 장지는 청주시 선영. (02)2227-7500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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