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냐, 빳때리냐: 전기차의 미래
#1│국어로 보통 축전지(蓄電池), 건전지(乾電池)라고 번역되는 배터리(battery)는 요즘에야 이 이름으로 불리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이 말의 일본식 발음에다 경음 발음이 강조된 '빳때리'라는 이름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대중의 교육 수준이 올라가서인지 이 단어의 표기가 대부분 배터리로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2009년에 데뷔한 한 인기 트로트 여가수의 첫 곡 이름은 '사랑의 밧데리'였는데, 이 곡의 이름이 어느새 '사랑의 배터리'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유튜브에도 떠 있는 그 가수의 공연 실황에서는 최근까지도 정확히 '빳때리'라고 발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배터리'의 어원은 라틴어 바투오(battuo)로 '때리다' '두들기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프랑스어로 들어가 '바트리(bat-terie)'가 됐고 뜻은 역시 '때리기' '폭행' 등으로 쓰이다가 이후에 군사 용어로 '포격' 또는 '폭격'이란 뜻으로 그 의미가 확장됐다. 이 말은 여러 대포가 모여 포격을 행하는 '대포 부대'의 뜻으로도 쓰였다. 영어에도 이런 뜻으로 이 단어가 들어왔다. 그러므로 '빳때리'라는 말도 '빡' '때리'는 뜻이 연상되니 오히려 어원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 말이 축전지의 뜻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에 의해서다. 그는 세계 최초로 전기가 양전기와 음전기로 이루어졌음을 밝혔고, 번개가 전기 현상임을 규명한 관련 분야 최고의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 무렵 네덜란드의 도시 라이덴에서 피터 판 무센브로크(Pieter Van Musschenbroek) 등의 학자는 원시적인 축전지인 ‘라이덴 항아리 (Leyden Jar)’를 발명했다. 프랭클린은 이 항아리 속의 한쪽에 양전기가, 다른 한쪽에 음전기가 저장돼 있는 것을 보고 이 항아리를 여러 개 묶으면 저장하는 전기의 양이 그만큼 늘 것이라 생각했고, 이 항아리의 집합을 대포 부대를 의미하는 배터리라고 명명했다.
즉 대포 부대의 여러 대포가 포탄을 쏘아 내듯 이 ‘항아리 부대’가 전기를 쏘아 낼 것이라 연상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배터리의 효시는 1800년 이탈리아 과학자 알렉산드로 볼타(Alessandro Volta)의 발명품이라고 공인되고 있다.
#3│전기차는 1832년 로버트 앤더슨이라는 영국인이 발명했다. 그가 발명한 전기차는 재충전이 불가능해서 전기가 소진되면 축전지 자체를 갈아야 했다. 요즘 '일차전지'라 불리는 형태였다. 1859년에는 재충전이 가능한 소위 '이차전지'가 발명되면서 전기차의 인기는 크게 솟았다. 포르쉐 설립자인 독일의 페르디난트 포르쉐도 P1이라는 전기차 모델을 개발해 출시할 정도였다. 이 결과 20세기 초 미국에서 팔리는 자동차의 3분의 1 이상이 전기차였다.
그러나 1908년 헨리 포드가 ‘모델 T’라는 내연기관 차종을 대량생산 방식으로 값싸게 생산하면서 전기차의 인기는 갑자기 시들해졌다. 이후에도 중동에서 대량의 유전이 발견되며 더욱 저렴해진 화석연료는 전기차의 입지를 아예 없애다시피 했다. 1970년대 이후 유가 파동이 있을 때마다 전기차에 대한 관심이 반짝 살아나긴 했지만 이후 다시 유가가 떨어지면 관심도 떨어졌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최장 열대야 기록을 연일 경신했으며, 여기가 한국이냐고 반문할 만큼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지역도 있었다. 중국, 미국도 폭염과 홍수에 시달렸다. 이런 전 세계적인 기상이변은 이제 구조적인 변화로 보인다. 인류의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탄소 배출이 지구의 온도를 올려서 벌어진 현상이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기후변화는 인류의 육식 증가로 인해 많이 늘어난 가축의 메탄가스도 그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특히 기름을 연소해 달리는 자동차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이런 상황에서 금세기 들어 전기차의 부활은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각국 정부는 앞다퉈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차를 의무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중국은 2035년 내연기관차의 판매 금지를 추진하고 있고, 미국도 자동차, 석유 업계의 강한 로비에 부딪히고 있지만 2032년까지 신차 판매량의 최대 56%까지 전기차로 채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이와 함께 보조금 지급 등 각종 유인책 실시와 함께 충전소 인프라 확충에도 나서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전 세계에서 판매된 자동차 중 전기차 및 하이브리드 차의 비중은 10년 전 0.2%에 불과했지만, 2023년 18%까지 커졌다.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이며, 2040년쯤에는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의 적어도 4분의 3 이상은 전기차가 차지할 것이라는 예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최근 세계적으로 전기차, 특히 그 동력원인 배터리에 관련된 사건과 사고가 잦아지는 양상이다. 국내에서도 인천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는 벤츠의 전기차 모델에서 불이 나, 수십·수백 대의 차가 전소되거나 그을렸으며, 주차장 위의 아파트에도 그을음이 차서 주민이 한참이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사고 원인은 벤츠에 탑재된 중국의 한 중소기업이 만든 배터리가 발화한 것이라 한다.
미국, 중국에서도 전기차 배터리가 자연발화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보도되고 있다. 이런 문제 때문인지 최근 국내외적으로 전기차에 대한 수요가 주춤해지는 양상이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판단된다. 무엇보다도 기후변화 등의 문제는 너무 위중해서 각국 정부의 정책 방향이 크게 바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전기차 원가에서 아직도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배터리 산업은 성장세가 지속될 전망이다. 한 시장조사 업체(Precedence Research)에 따르면 세계 배터리 산업의 시장 규모는 올해 1460억달러(약 195조원)로, 2034년에는 6809억달러(약 910조원)까지 커질 전망이다. 연평균 16.6%의 신장률이다.
일찍이 이 산업의 잠재력에 눈을 뜬 국내 기업들은 막대한 보조금과 내수 판매에 힘입은 중국 업체들에 턱밑까지 추격을 허용한 상태이긴 하나, 아직도 세계 제일의 기술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예를 들어 요즘의 발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은 배터리 내부를 고체로 채운 소위 ‘전고체’ 배터리라고 하는데, 이 분야를 선도하는 것은 한국 기업들이다.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에는 앞으로도 최장 10년이 걸린다고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 대안으로 소위 ‘4680’이라는 차세대 원통형 배터리가 떠오르고 있는데, 안정성과 효율성이 높은 이 배터리도 국내 업체들이 세계 최초로 조만간 양산에 나설 예정으로 시장을 주도할 전망이다. 현재 배터리 판매량 면에서는 CATL과 BYD 등 중국 업체들이 방대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전 세계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지만, 아직 중국 업체들은 한국 기업들과의 기술 격차가 있다. 우리 기업들의 계획대로 잘 이행된다면 차세대 배터리 시장의 주도권을 한국 기업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추격 이외에도 여러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및 유럽의 자동차 업체들이 배터리를 자체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또한, 전 세계 배터리 업계는 리튬, 희토류, 흑연 등 광물 광산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중국 업체들과 ‘재료 확보 경쟁력’ 측면에서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중국 전기차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 등 각국 정부의 견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중국을 대체할 배터리 재료의 원산지가 남미, 호주 등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바닷물 등 값싼 재료가 대체재로 등장하는 등 국내 업체에 우호적인 상황도 전개되고 있다. 결국 배터리의 어원처럼 세계시장을 기술력으로 ‘두들겨’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로 보인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배터리 산업은 반도체처럼 한국 경제의 차세대 먹거리 산업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것이다. 국내 업체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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