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용정 그리고 근대 풍경] ⑧ 누이님 전에 글월을 올립니다
◇…청년 심연수(1918~1945)는 국권을 빼앗긴 시대에 짧은 생애를 살면서 대표작 ‘소년아 봄은 오려니’를 비롯한 290여 편의 시와 소설, 수필, 평론 등 풍부한 한글문학을 남겼다. 강릉 운정동에서 태어나 1925년 고향을 떠난 뒤 러시아, 중국, 일본을 넘나드는 삶을 살았으며 광복 직전 중국 왕청현에서 불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하고 고단한 삶 한가운데서도 언제나 문학을 곁에 두었던 그의 존재는 사후 55년인 2000년 8월 중국의 생존한 동생 유족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유족들이 잘 간수해온 육필자선시집 ‘지평선’을 비롯한 각종 원고류, 편지, 공책, 수첩, 일기, 도서, 사진, 스크랩 등 다양한 유고와 유품류는 조카 심상만씨에 의해 고향 강릉의 품에 안겼다. 600점 내외의 자료는 2018~2023년 『심연수문학사료전집』(강릉문화원·심연수기념사업회·강원도민일보)으로 완간됐다. 이 자료를 직접 정리할 기회를 가졌던 필자는 그가 남긴 작품원고, 생활기록, 유품을 소개하며 스산했던 시대에 한 시인을 넘어 강원인 이주사를 공유하려 한다.
[강릉, 용정 그리고 근대 풍경] ⑧ 누이님 전에 글월을 올립니다
심연수 가족이 1925년 무슨 이유로 강릉을 떠나게 됐는지 뒷받침하는 직접 기록은 없으나,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삼촌’을 따라 러시아로 건너가게 됐다고 유족들은 일관되게 밝혀왔다. 삼촌은 ‘심우택’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넘나들면서 항일운동을 했던 이동휘 휘하 독립단의 일원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심연수는 자전적인 시 ‘만주’에서 강릉에서는 살기가 어려워 조부모를 비롯한 대가족이 떠나게 됐다고 쓰고 있다.
경포호 부근 마을에서 삼척 심씨 집안의 가까운 친인척과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 같은 민족이 사는 곳도 아닌 낯선 타국으로 이주 결단을 하게 되기까지 그 이유가 단순할 리 없고 동시에 마음 먹기 어려웠음도 충분히 짐작된다. 심연수 7세였을 때 3대에 걸친 대가족은 어선을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조부모 심대규와 평창이씨, 부모 심운택과 강릉최씨 최정배, 삼촌과 고모, 동생 2명 그리고 친척 한 명도 함께 했다.
고향과 고국을 떠나는 이별의 아픔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본가인 삼척심씨 집안만 해당되지 않는다. 할머니와 어머니 입장에서는 각각 본가 가족과 헤어져야하는 서러움을 이중으로 겪은 것이다. 할머니 평창이씨와 어머니 최정배의 본가는 모두 강릉이었다.
시집의 결정으로 인해 친정 가족과 이별해야했던 이들 여성의 속마음은 어땠는지 알 길이 없으나, 생전에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을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심연수·심호수 형제와 그의 아버지 심운택은 학비 마련과 호적 신고 등을 위해 강릉을 다시 찾은 적이 있으나, 이들 두 여성은 전혀 기회가 없었다.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회한을 담은 한 통의 편지가 있다. 평창 진부면 탑동리에 사는 이춘식이 러시아를 거쳐 중국 용정으로 이주해 사는 심연수의 할머니인 평창이씨에게 보낸 서신이다. 이춘식은 멀고 먼 곳에 있어서 오고 가기에 불통이고, 소식 듣기도 오랜만이 된 누님을 향한 안타까움과 정을 한글자 한글자 새기듯 글자를 눌러쓴 듯 하다. 1944년 2월 18일(음 1월 24일) ‘누이임 젼의 글월을 올님니다’로 시작해 두번 절하며 편지를 올린다고 적었다.
박미현 논설실장
누이님 전에 글월을 올립니다.
여러 적년에 뵈옵지 못하오매 하 정의 묘연하옵더니 천만뜻밖에 호수를 처음 보니 반가온지만지 마음을 정치 못하오며 또 제 예소전을 듯사오니 할머님도 안녕하시고 온 집안이 두루 무고하며 제 형 연수도 왔다 하오니 더욱 기쁘나이다. 이곳 동생은 세전 세후의 우환으로 경황없이 지내옵다가 지금에야 조금 마음을 놓는 모양이올시다. 누이님은 손자를 5형제를 두셨으니 참 장한 일이오며 더구나 손녀들까지 공부를 시키셨다니 또한 드문 일이오며 연수는 이왕에 제 사진을 보았고 호수는 이번에 대면을 하여보니 다 출중하온지라 그 남은 형제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또한 어찌 범연하오리까. (생략) 내내 기후 강영하옵심을 바래오며 이만 아룁니다. 갑진 음력 정월 이십사일 동생 춘식은 재배 상서하나이다.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역대급 폭염에 8월 전기료 '폭탄'
- “혹시 내 사진도?” 딥페이크 성범죄물 명단 일파만파
- 추석 코앞인데… 양양송이 공판 감감무소식 ‘왜?’
- '2명 사망' 강릉대교 차량 추락사고 유발한 20대 입건
- '응급실 근무의사 블랙리스트' 등장…"감사한 의사" 비꼬며 올려
- '개 짖는 소리 시끄럽다'… 농약 탄 음식 이웃집 개들 먹인 60대 송치
- '꼭두새벽'부터 공무원 깨운 까닭은?
- ‘응급실 난동’ 현직 여경, 1계급 강등처분 중징계
- ‘강릉커피콩빵’ 원조 논란 법원 “레시피 표절 아냐”
- 서울 한 판매점서 로또 1등 5장 나와…동일인이면 77억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