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장애인 지원하는 사람이 장애인 성폭행… 집이어도 ‘가중처벌’

손고운 기자 2024. 9. 1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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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24 장애인 인권 판결 - 성폭력 부문]
정신장애인 성폭력 사건에 피해자 중심주의 적용 ‘디딤돌’… 장애 학생 성적 그림 합성 사건 솜방망이 판결에 ‘걸림돌’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인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 속 한 장면.

장애인을 지원하는 사람이 장애인을 성폭행할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장애인 활동보조기관 종사자인 안아무개(50)씨는 뇌병변 1급장애인인 박해연(가명)씨의 일상을 지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2020년 11월부터 2021년 6월까지 대소변 처리, 목욕 등의 일을 맡았다. 사건은 2021년 3월8일 발생했다. 안씨는 해연씨의 집에서 그를 목욕시킨 뒤 유사성행위를 시도했고, 해연씨는 저항했다. 같은 해 5월21일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안씨는 해연씨의 입술을 핥는 행위 외에도 3회 유사강간 미수, 4회 강제추행을 했고 7회 폭행했다.

디딤돌: 장애인활동지원기관 종사자 성범죄, 가중처벌 판단한 원심 확정(대법원 2023도2358)

대법원 2부(재판장 민유숙 대법관)는 2023년 4월13일 성폭력처벌법 위반, 장애인복지법 위반결 선정위원회가 2024년 9월2일 발표한 올해의 ‘디딤돌 판결’ 중 하나로 선정됐다. 이 판결이 장애인활동지원기관을 장애인 시설로 포함해, 장애인활동지원기관 종사자의 성범죄가 성폭력처벌법상 가중처벌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성폭력처벌법 제6조 7항을 보면, 장애인의 보호·교육 등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의 장 또는 종사자가 보호·감독 대상인 장애인에 대해 (같은 조 1~6항에서 정한) 죄를 범한 경우 가중처벌을 하게 돼 있다. 이 사건 재판에서는 과연 장애인활동지원기관 소속 종사자가 ‘장애인의 보호 교육 등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의 종사자’인지가 문제가 됐다. 법원에서는 성폭력처벌법 입법 취지를 고려해 가중처벌을 인정했다.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강송욱 법무법인 디엘지 변호사는 “이 판결은 장애인의 보호·교육 등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의 종사자가 장애인에 대한 신뢰를 깨고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불법성과 비난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에서 제재를 강화한 성폭력처벌법의 입법 취지를 고려해 피해자의 보호에 더 중점을 둔 적극적 해석을 했다는 점에서 디딤돌 판결에 해당한다”고 선정 의견을 밝혔다.

한겨레21이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받은 ‘장애인 대상 성폭력 범죄 발생 현황’(경찰청 자료)을 보면, 최근 발생한 장애인 성폭력 사건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해연씨 사례처럼 집에서 일어났다(2023년 749건 중 337건). 2022년은 757건 중 294건이, 2021년은 694건 중 317건이, 2020년은 792건 중 363건이 집에서 발생했다. 피해자는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다. 2023년 집계를 보면, 피해자 755명 가운데 702명이 여성이었는데, 연령은 10대 141명, 20대 243명, 30대 114명이었다.

디딤돌: “그 사람이 억지로”…장애 특성 이해한 판결(대법원 2020도15730)

정신장애 3급(사회연령 10살2개월) 및 조현병이 있는 이정은(20대·가명)씨는 2017년 7월 오락실에서 혼자 게임을 하다가 40대 ㄱ씨를 만났다. ㄱ씨는 정은씨가 말이 어눌하고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장애인임을 인지하고 “먹을 것 사줄게. 같이 가자” 등 말을 하며 음료수를 사줬다. 이후 정은씨를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했는데, 정은씨는 이로 인해 임신했고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원심에서는 ㄱ씨가 피해자에게 만남을 제안한 것에 불과해, 간음행위 자체나 간음행위의 동기 등에 관해 피해자로 하여금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게 하는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또 간음과 관련해 피고인이 어떤 위계적 언동을 했는지 등에 관한 내용이 없다고 봤다.

반면 대법원(재판장 조재연 대법관)은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보호 대상으로 삼는 아동·청소년, 미성년자, 심신미약자, 피보호자 피감독자, 장애인 등의 성적 자기결정 능력은 개인별 차이가 있어 ‘구체적 범행 상황에 놓인 피해자의 입장이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고 봤다. 이에 정은씨는 ㄱ씨가 정은씨와 연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 오인·착각이 있었고, 성행위의 의미와 결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ㄱ씨의 성관계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고 봤다. 정은씨가 진술한 내용을 보면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사귀는 건 좋았는데 하는 건 싫었다”거나 “그 사람이 억지로 했다. 저는 조금 막으려고 했다” 등의 내용이 있다.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는 “장애인 성폭력 사건의 절대다수가 정신장애인에 대한 것이고, 한국 사회에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성폭력이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문제가 된 게 사실상 2000년 이후부터인데, 정신장애인의 진술 신빙성이나 피해자 중심 관점은 여전히 요원한 현실”이라며 “(원심의) 무죄 판결의 주된 이유는 위계, 위력에 대한 해석을 좁게 하고 피해자 진술을 장애 특성을 고려해 충분히 해석해내지 못한 면모”라고 지적했다. 반면 대법원 판결에 대해선 “피해자의 진술에 대해 피해자가 인식하는 연애나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 안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 보여준 중요한 판례”라고 평가했다.

걸림돌: 얼굴 사진 합성 성폭력 사건, 장애학생 인권 소극적 판단(대구지방법원 2022구합23588)

한 고등학교에서 가해 학생 ㄴ·ㄷ이 특수학급에 속한 학생들의 얼굴 사진을 성적인 그림에 합성한 일이 발생했다. 침대에서 이불을 덮은 채 껴안고 누워 있는 남녀의 그림에 특수학급 학생 2명의 얼굴 사진을 합성한 것이다. ㄴ과 ㄷ은 특수학급 학생들 외에도 여러 다른 학생들 사진을 나체사진 등에 합성해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주고받으며 사이버폭력을 행했다. 이에 ㄴ은 경북울진교육지원청으로부터 출석정지 10일, 피해 학생들에 대한 접촉과 협박 및 보복행위 금지, 특별교육이수 10시간 및 보호자 특별교육이수 5시간 조처를 받았다. ㄷ은 사회봉사 8시간, 특별교육이수 7시간, 보호자 특별교육이수 5시간 조처를 받았다.

문제는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가 조처 과정에서 ‘장애인 피해자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피해 학생 쪽은 피해 학생이 장애 학생임에도 심의 과정에서 특수교육 전문가 또는 장애인 전문가를 출석하게 하는 등의 조처를 하지 않았고, 가해 학생에 대해 장애인식 개선교육 내용을 포함하지 않은 것 등에서 절차상 위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결(대구지방법원 제2행정부 재판장 신헌석)했다.

이 판결은 올해의 ‘걸림돌 판결’ 중 하나로 선정됐다.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강송욱 법무법인 디엘지 변호사는 “법원이 기존 대법원 판례에 따른 재량행위 위법성 판단 기준을 기계적으로 답습해 장애인권 보호 관점에서 소극적 판단을 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됐다”고 지적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선정 '장애인 인권 디딤돌, 걸림돌' 판결

“법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고 적용되는지가 중요하다.”(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치훈 소장)

대한민국에는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22개 법률이 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과 장애인차별급지법 등 체계적인 보호장치도 마련돼 있다. 그러나 법의 존재가 곧장 장애인의 권리 실현을 담보하진 못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사법부 판결들이 장애인 권리의 실질적 실현을 결정짓고, 사회를 변화시킨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매년 사법부 판결을 면밀히 분석해 장애인 인권의 ‘디딤돌’이 되는 판결과 ‘걸림돌’이 되는 판결을 선정하고 있다. 올해도 2023년 1월∼12월 선고된 판결 중 ‘장애’를 언급한 판결, 장애와 관련된 사안이 중요하게 다뤄진 판결 4천여건을 수집했다. 올해는 이 가운데 ‘디딤돌 판결’ 12건과 ‘걸림돌 판결’ 4건, ‘주목할 판결(장애인 인권과 관련된 많은 고민을 불러일으킨 판결)’ 2건을 선정했다.

최종 선정위원으로 강송욱 법무법인 디엘지 변호사, 김성태 서울장애인권익옹호기관 인권증진팀 팀장,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 변재원 소수자정책연구자, 윤여형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변호사, 임한결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 조인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가 참여했다. —편집자주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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