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김우겸이 품어온 마음, ‘열심(熱心)’

손동환 2024. 9. 1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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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4년 8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7월 22일 오전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화려하지도 않았고, 눈에 띄었던 선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곳에 오랜 시간 머물렀다. 그 곳에서 해야 할 일을 ‘열심(熱心)’히 했다. 선수로서 자연스럽게 인정받았다.
지금은 지도자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지도자로서도 ‘열심(熱心)’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있다. 그리고 ‘농구’를 ‘인생의 전부’로 여기고 있다. ‘서울 SK 원 클럽 플레이어’였던 김우겸(한양대 코치)의 이야기다.

우직한 빅맨
한양대를 졸업한 김우겸은 2009년에 열린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7순위로 서울 SK에 입단했다. 데뷔 시즌(2009~2010)에는 정규리그 47경기에 나섰고, 경기당 12분 25초를 소화했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을 소화했다.
그러나 김우겸은 데뷔 시즌 직후 군대로 향했다. 그리고 2011~2012시즌에 복귀했다. 8경기 밖에 뛰지 않았지만, 경기당 17분 45초를 소화했다. 평균 기록은 5.3점 1.4리바운드. 표본은 많지 않았지만,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2009년에 열린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7순위로 서울 SK에 입단했습니다.
저는 3학년 때 드래프트에 참가했습니다. 얼리 엔트리였죠. 드래프트를 신청한 후, “A팀이랑 B팀이 너를 좋게 보더라”고 들었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하지만 현장에 가니, 너무 떨리더라고요.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순번을 얻었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드래프트를 마쳤고, 맥주 한 잔 먹었습니다. 바로 기절했어요.(웃음) 아마 긴장했던 게 확 풀렸던 것 같아요.
SK의 첫 인상은 어땠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프로 팀의 훈련 환경은 대학 팀과 확연히 달라요. ‘여기가 프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TV에서만 봤던 문경은 감독님(전 KBL 경기본부장)과 전희철 감독님(현 서울 SK 감독)이 제 옆에 있었습니다. 엄청 신기했어요.
데뷔 시즌은 어떠셨나요?
당시 김진 감독님께서 신인 선수들에게 많은 시간을 부여하셨습니다.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셨죠. 또, 감독님께서 “신인들끼리 외출 한 번 다녀와”라고 배려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기와 같이 한강에 갔고, 한강에서 머리를 식혔습니다.
한강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마음이 가장 강했습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 제대 직후에는 짧게나마 경기를 뛰었고요.
좋은 빅맨이 저희 팀에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기록이 어느 정도 있을 때, 상무에 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제대를 했는데, 문경은 감독님께서 저를 엔트리에 포함시켜주셨어요. 너무 감사했고,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다짐했죠.

ONE CLUB PLAYER
SK는 2012~2013시즌부터 문경은 감독(전 KBL 경기본부장)-전희철 수석코치(현 서울 SK 감독) 등을 코칭스태프로 삼았다. 새롭게 선임된 코칭스태프는 SK의 체질을 개선했다. 그 결과, ‘포워드 농구’와 ‘빠른 농구’라는 확실한 컬러가 SK에 새겨졌다.
컬러를 확실히 새긴 SK는 이전과 달라졌다. ‘KBL 역대 정규리그 최다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SK는 2012~2013 정규리그에서 44승을 기록했다. DB가 2011~2012 정규리그에서 세운 승수와 동일하다) ‘신흥 강호’로 거듭났다.
하지만 김우겸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2012~2013시즌부터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9~2020시즌에 유니폼을 벗었다. 그러나 내세울 기록들이 몇 개 있다. ‘정규리그 1위’와 ‘플레이오프 우승’, 그리고 ‘SK ONE CLUB PLAYER’다.

SK는 2012~2013시즌부터 순항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수 김우겸’의 입지는 줄어들었는데요.
좋은 선수들이 많이 가세했습니다. 특히, ‘최부경’이라는 좋은 신인이 들어왔죠. 그래서 제가 부담을 느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습니다.
게다가 제 키가 포지션에 비해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비와 궂은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무엇보다 ‘열심(熱心)’이라는 단어에 집중했습니다. 남들보다 한 발 더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결국 2019~2020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습니다.
계약 기간이 2020~2021시즌까지였을 거예요. 그렇지만 허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급작스런 통증이 많아져, 엔트리에서 빠지는 일도 많았죠. 코칭스태프에게 죄송했어요. 그러다가 이제는 안 될 것 같았고, 사무국에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사실 SK는 저의 은퇴를 대충 넘길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저를 한양대 농구부로 연결해줬습니다. 지도자 연수를 받게 한 거죠. 그리고 2020~2021시즌 보수도 저에게 지원해줬습니다. 덕분에, 제가 지금의 자리(한양대 정식 코치)에 도달할 수 있었어요. 엄청난 행운이었죠. 그래서 SK에 더욱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선수로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규리그 1위’와 ‘플레이오프 우승’을 경험하셨어요. 선수로서 얻기 힘든 타이틀인데요.
선배님들께서 “반지 하나 없이 은퇴하는 선수도 많아”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비록 주축 멤버는 아니었지만, 저도 팀원들과 우승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우승 반지도 얻었고요. 선수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죠.
SK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SK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습니다. 이는 ‘선수 김우겸’에게 큰 의미일 것 같아요.
‘다른 팀에 가면, 기회를 더 얻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감독님에게 트레이드를 건의하기도 했죠. 그때마다 감독님께서는 “우리는 너를 필요로 하니, 너가 조금 더 기다려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독님께서 붙잡아주신 덕분에, 저는 SK라는 명문 구단과 끝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SK가 저를 좋게 봐주셨기 때문에, 제가 ‘SK ONE CLUB PLAYER’라는 타이틀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SK와 함께 했기 때문에, 더 좋았던 것 같아요.

터닝 포인트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만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우겸도 마찬가지였다. 선수 생활을 더 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을 마쳤기 때문에, 새로운 포인트와 마주할 수 있었다. 유니폼을 벗은 김우겸은 모교인 한양대로 향했다. 정재훈 감독과 함께,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 동시에, ‘지도자’로서의 내공을 쌓고 있다.

은퇴 후 한양대 코치로 부임했습니다.
한양대에서 연수 받는 기간은 1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재훈 감독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셨고, 저에게 “정식 코치로 일해보자”고 제의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했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다짐했죠. 다 SK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SK가 없었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SK에 더 감사해요.
오랜만에 대학교로 향했습니다. 프로와의 차이를 느꼈을 것 같아요.
인프라의 차이도 있지만, 선수들의 인식 차이도 존재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저희 때는 ‘농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운동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은 그런 게 약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선수들에게 그런 점을 이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비록 엄청난 커리어를 보유한 건 아니지만, 여러 유형의 선수들을 프로에서 지켜봤습니다. 무엇보다 대학 선수들의 목표는 프로입니다. 프로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한테 프로에서 오래 생존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느새 ‘5년차 코치’가 됐습니다. 그 동안, ‘코치 김우겸’이 쌓은 철학은 무엇인가요?
앞서 말씀드렸듯, 우리 나라 대학 선수들의 최종 목표는 ‘프로’입니다. 저학년 선수들이 프로 팀의 관심을 받아도, 저희는 얼리 엔트리를 장려해야 해요. 저희 학교의 전력이 약해진다고 해서, 코칭스태프가 선수들의 미래를 막으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수비부터 해야 합니다. 슈퍼스타가 아닌 이상, 그렇게 해야 해요. 실제로, 그렇게 해야, 오래 살아남고요. 저희 학교를 나온 오재현 선수(서울 SK)가 좋은 예라고 생각해요.
지도자로서 공부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요?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수들과 대화를 더 많이 하려고 해요. (이유가 있다면?) 선수들의 생각을 파악하는 게, 첫 번째라고 생각하거든요.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김우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농구 인생을 돌아봐달라”고 말이다.
김우겸은 20년 넘게 코트와 호흡하고 있다. 코트에 있는 시간 동안, 숱한 일들을 겪었다. 그리고 코트 안에서 여러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농구는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고 이야기했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습니다. 너무 늦게 시작했죠. 하지만 농구는 이제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끊을 수 없는 존재가 됐어요.(웃음)
‘김우겸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풀린 것 같아요. 원 클럽 플레이어도 해봤고, 우승 반지도 껴봤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좋은 감독님 밑에서 코치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과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다만, ‘열심히 하다 보면, 길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꼭 슈퍼스타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물론이죠. 농구는 그만큼 매력적인 운동이니까요. 그리고 조금 더 열심히 할 것 같아요. ‘어릴 때 왜 열심히 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늘 했거든요. 또, 지금은 (농구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더 열심히 한다면,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혹시 농구를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선수 김우겸’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농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더 간절했던 것 같아요. 다른 선수들을 따라잡기 위해, 더 열심히 했으니까요. 오히려 농구를 일찍 시작했다면, 다른 선수들보다 뒤처졌을 것 같아요.

일러스트 = 락(본문 1번째 사진)
사진 제공 = KBL(본문 2~4번째 사진), 한국대학농구연맹(본문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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