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또 바뀝니다”…대출 시장 촌극에 소비자만 골탕
“절판 마케팅에 8월 영끌 최다, 정책대출도 속도 조절 필요”
[주간경향] 가계대출 급증세를 막기 위해 지난 두 달간 경쟁적으로 대출 문턱을 높이던 은행들이 이번에는 실수요자를 위한 예외 규정을 쏟아내고 있다. ‘가계대출 급증세를 막되 실수요자는 알아서 선별해 보호하라’는 금융당국 주문에 은행들도 혼선을 겪고 있다. 당국 주문에 맞춰 은행들이 급하게 예외 규정을 내놓으면서 상품을 판매하는 은행원들조차 시시각각 달라지는 규정을 숙지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 은행원도 모르는 누더기 대출 지침
은행마다 실수요자로 판단하는 기준이 제각각인 데다 앞으로도 계속 대출 조건이 바뀔 수 있어 소비자들의 혼란은 당분간 불가피할 예정이다. 소비자는 본인이 실수자요임을 은행에 증명하기 위해 이혼서류나 청첩장 등을 준비해야 한다. 같은 사람이 은행에 따라 실수요자로, 투기 수요로도 분류되는 복불복 현상이 나타나자, 부동산 카페 등에서는 <실수요자 대출을 받는 꿀팁>을 유료로 알려주는 특강 정보까지 등장했다.
은행권에서는 향후 변수가 많은 만큼 당분간 시장을 관망하며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고 당부한다. 전문가들은 대출 규제가 가계부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일부 효과를 낼 것이라면서도, 지역 간 격차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또 정부의 정책자금 대출이 집값을 끌어올리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 만큼 정책금융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은행들은 최근 ‘실수요자 판별 전담팀’을 잇달아 신설했다. 가계대출 억제를 위한 일률적 대출 규제로 억울한 실수요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어서다. 은행들은 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1주택 갈아타기 차주가 기존 주택 매도 계약서 확인을 통해 예외를 인정하는 등의 실수요 관련 심사 사례를 공유하며 보완키로 했다.
지난 9월 12일 기준으로 주요 4대 은행(KB국민·신한· 하나·우리) 중 1주택자가 주택담보대출(주담대)과 전세 대출을 모두 받을 수 있는 곳은 하나은행이 유일하다. 하나은행이 1주택자에 대한 대출 문턱을 높이지 않은 것은 다른 은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계대출 증가율에 여유가 있어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은행의 연초 경영계획 대비 가계대출 증가 비율은 우리은행 376%, 신한은행 155%, 국민은행 145%, 하나은행 131% 순으로 집계됐다. 해당 비율이 낮은 곳일수록 대출에 대한 규제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기본적으로 무주택자가 첫 주택을 마련하는 경우에는 주담대 대출이 가능하고, 갭투자(전세 낀 주택 구입)로 활용된다고 지적받은 전세 대출은 막고 있다. 그 외 은행들은 1주택자에게도 대출을 해줄 수 있는 ‘실수요자 예외 조항’을 두는데 각사마다 다르다. 소비자로서는 대출 자격 요건이 되는지 알려면 은행마다 발품을 팔아 일일이 상담을 해야 한다.
은행권에서는 대내외 불확실성이 높아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은행 관계자 A씨는 “현 지침도 일시적인 계획이라 앞으로 언제 어떻게 바뀔지 창구에서도 규제 내용을 자세히 모르는 상황”이라며 “통상 4분기에는 (은행이) 대출실적을 달성해 금리가 높아지고 연초에는 새해 경영 계획에 맞춰 원위치가 돼 다시 금리가 내려가는 경향이 있어, 향후 시장을 차분히 보고 신중히 접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 1주택 실수요자 요건 놓고 논란 일듯
정부의 대출 규제 효과는 있을까. 은행 관계자 B씨는 “국회 동의가 필요한 세금 등의 규제와 달리 (대출 규제는) 수요를 억제하는 가장 빠르고 효과가 높은 정책으로, 역대 정부들도 집값이 오르면 대출부터 조였다”며 “다만 효과가 장기적으로 이어지려면 여러 시장 상황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집값을 잡기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집값을 안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역 간 격차를 더 벌어지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권대중 서강대 대학원 부동산학과 교수는 “가계부채를 관리하는 데는 효과를 낼 수 있겠지만, 공급 부족이 예상되는 수도권의 집값을 누르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가격 상승이 기대되는 중저가 지역을 놓고 선호 지역과 비선호 지역이, 서울과 지방 간의 양극화 격차가 더 커지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권 교수는 “서울을 중심으로 대책이 만들어지다 보니 지역 간 양극화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며 “지방 주택시장을 활성화할 수 있는 정책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앞선 두 달간 대출 시장에서는 ‘촌극’이 벌어졌다. 당국은 지난 7월 대출 확대로 인한 가계 부채 문제를 지적했고, 은행은 30여건의 대출 지침을 발표했다. 금리는 계속 올랐고, 금융당국이 사실상 이를 방조해 은행의 이자 수익만 불려준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8월 25일 “대출 금리 상승은 당국이 바란 게 아니다. 금리 인상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며 “더 세게 개입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 후 은행은 경쟁하듯 1주택자에 대해 조건부 전세대출 제한, 신용대출 한도 제한 등의 방안을 내놨다. 세밀하게 준비되지 않은 정책에 갑자기 대출이 막혀버린 실수요자들은 피해를 보기도 했다. 당장 오는 11월 입주를 시작하는 서울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단지 관련해서도 은행에 따라 대출 여부가 달라 실수요자 사이에 불만이 커졌다.
논란이 일자 이 원장은 지난 9월 4일 “실수요자 보호가 필요하다”며 규제 완화를 시사했다. 오락가락하는 그의 발언에 대출 정책은 갈지자 행보를 이어갔다.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대출 규제에 시장과 실수요자는 몸살을 앓았다. 결국 이 원장은 지난 9월 10일 은행장간담회에서 대출 정책과 관련한 오락가락한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가계대출 급증세와 관련해 세밀하게 입장과 메시지를 내지 못한 부분, 국민과 은행창구 직원에게 불편과 어려움을 드린 점에 대해 죄송하다”고 밝혔다. 자신이 은행의 대출금리 인상을 비판하고서 은행들이 대출 규제를 내놓자 이로 인한 실수요자 피해를 지적하면서 불거진 혼란을 거론하며 사과했다. 그는 가계대출 관리 방향에 대해 “은행마다 여신 포트폴리오가 달라 여신 심사에 대한 특정 기준을 세우되, 그레이존(어느 영역인지 불분명한 회색지대)에 대해선 은행연합회와 논의하는 방식이 나왔다”고 말했다.
■ 9~10월 주택시장, 대출정책 가를 분기점
혼란을 겪는 사이 부채는 더 증가했다. 서울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최근 주택 거래가 크게 늘면서 지난 8월 은행권 주담대가 8조2000억원 늘며 역대 가장 큰 증가폭을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금융당국의 가계부채 관리에 대한 정책이 실패한 셈이다.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는 지난 9월 11일 은행권의 8월 말 가계대출 잔액이 전달보다 9조3000억원 늘어 총 1130조원으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이중 주담대는 8조2000억원 늘어 8월 말 기준 잔액은 890조6000억원에 달했다. 8월 증가폭은 2004년 통계 편제 이후 가장 큰 수치다.
특히 8월 주담대가 늘어난 데는 금융당국이 2단계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시행을 애초 7월에서 9월로 늦춘 것도 요인으로 꼽혔다. 박민철 한은 시장총괄팀 차장은 “지난 5~6월 서울 아파트 매매거래가 늘었고 대출은 2~3개월 시차를 두고 영향을 받는다”면서 “과거에도 대출 규제가 예정돼 있으면 그 전에 대출을 받으려는 선수요가 발생하는데 그 영향도 있었다”고 했다. 대출 한도가 축소되기 전 ‘막차 영끌’ 수요가 급증했다는 지적이다. 그는 “2단계 스트레스 DSR 규제 시행 등으로 9월 증가폭은 축소될 것으로 본다”며 “집값 상승 기대와 이사철 수요, 금리 인하 전망 등은 불안 요인”이라고 했다.
국제기구는 한국의 과도한 가계부채가 경제성장을 저해한다고 또다시 경고음을 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 9월 11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국과 중국을 두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신용 비율이 100%를 넘어 경제성장률도 정점을 찍었다”고 말했다. 민간신용은 금융기관을 제외한 기업, 가계 등 민간부문 부채로, 한국의 민간신용 비율은 작년 말 222.7%(BIS 기준)로 가계부채 100.5%, 기업부채 122.3%다. 처음에는 부채가 성장을 촉진하는 정비례 관계를 보이다가 100%를 넘으면 꼭짓점을 찍고 반비례로 돌아서 성장을 가로막는 역 U자형 곡선을 그린다. 빚을 내 소비를 늘리면 단기적으로 성장률이 높아지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부채 상환과 이자 지급 부담에 성장 잠재력이 약화할 수 있다는 경고다.
가계부채에 대한 부처 수장들의 진단이 제각각인 것도 문제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9월 9일 “정책대출이 집값을 끌어올린 직접적 원인은 아니라면서 금리는 조정하되 대상을 줄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가계부채 관리를 위해 전방위적인 대출 조이기에 나선 상황에서 주담대의 80%에 육박하는 정책대출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지난 9월 6일 “가계대출이 늘어나는데 정책자금 비중이 높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여러 국제기구의 경고처럼 부채 총량을 줄이지 못하면, 한국은 소비와 투자가 모두 부동산에 몰려 내수 회복은 물론 경제성장도 어렵다”며 “정책금융도 소외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속도를 조절하며 규제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성 기자 k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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