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까지 밀린 한국군, 인천서 '역전 카운터' 날렸다[뉴스속오늘]

이소은 기자 2024. 9. 15.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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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월미도 앞 해상에서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 재연 행사'에서 해병대 상륙장갑차가 임무수행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상처로 꼽힌다.

전쟁 초반부터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압도했다. 한국군은 전쟁이 발발 한 달이 겨우 지난 8월 초,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 더 이상 밀릴 땅도 없었다. 더 물러섰다가는 동해와 남해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될 신세였다.

연합군은 이로부터 약 한 달 후인 1950년 9월 15일, 전세를 뒤집을 결정적 한 방을 날렸다. 74년 전 오늘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군과 UN군이 열세에 있었던 전황을 단숨에 뒤집었다. 이후 북한은 정전까지 과거의 위상을 한 번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날 인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국군, 초반 약세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

전쟁 개전 이후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붙였지만 이곳에서 전선이 굳어졌다.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조선인민군 정예부대의 전투력도 크게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 실제 1950년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점령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자칭 의용군 5만여명을 합쳐도 10만명이 채 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군 역시 대규모 강제징집과 소년병 동원이라는 전쟁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병력 확보에 열을 올려야 했던 상황이었다. 다만 유엔군의 참전 덕분에 동수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고 워커 중장의 방어전략으로 낙동강 전선을 유지하는 등 형편이 상대적으로 더 나았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펼치고 부산 주변 포위선을 뚫고 싶어 했다. 그러나 병력 제한이라는 한계에 부딪혔다. 맥아더 장군은 이에 대한 해법으로 과거 폐기됐던 '블루하츠(Operation Bluehearts) 작전'을 다시 떠올렸다. 인천을 통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작전으로, 앞서 7월 22일 실시하려 했으나 당시 북한군의 진격 속도라 너무 빨랐던 탓에 개시해보지도 못한 채 공식 폐기된 바 있었다.

인천 상륙해 북한 육상보급선 잘라버리는 전략
2016년 개봉한 인천상륙작전 영화 스냅 사진.
맥아더 장군은 블루하츠 작전의 작전명을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로 다시 짓고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다시 세웠다.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 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이 보급선을 잘라버리면 침략군 전체가 와해할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실제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까지의 육상 보급로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고, 이는 곧 인천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최적의 위치임을 의미했다.

인천에 배치된 병력이 매우 적을 것이라는 점도 상륙작전 지역을 인천으로 정한 이유였다. 대략 1000명 이내만 인천을 지키고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또, 인천은 김포 등 내륙으로 진입하기에 상대적으로 거리가 짧아 서울 자체를 점령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철로와 도로를 끊어 북한군의 병참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이런 이유를 들어 합참과 해군본부를 설득했다. 결국 작전은 1950년 8월 28일 최종 승인됐다.

상륙작전일은 9월 15일로 정해졌다. 다만 인천에 상륙한다고 해서 당일에 준비하고 있다가 그날 한 번에 공격한 것이 아니다. 작전 이틀 전 인천~군산, 삼척, 마량도(함경남도) 등 주요 해안에서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며 교란과 기만작전을 폈다. 적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인천 상륙에 방해가 될만한 주요 시설도 파괴했다.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 월미도를 비롯한 인천지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적의 판단을 흐리고 혼선을 주기 위해 인천에서 군산 사이의 해안선에 지속해서 포격이 이뤄졌다.

작전 개시 13일 만에 서울 탈환 성공
인천항 수로에서 열린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해군 특수전전단과 해병대원들이 팔미도 상륙을 위해 기동하고 있다. /사진=뉴스1
혼란스러운 틈을 타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의 명령에 의해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국의 제임스 도일 해군 소장이 유엔군 해군 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했다. 동원된 군함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의 대선단이었다.

맹렬한 함포 사격이 시작됐고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지휘 아래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 상륙했다. 이어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대한민국 해병대 연대급 부대와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된 대한민국 육군 17보병연대 역시 상륙해 인천을 탈환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김일성은 다급해졌다. 민족 보위상인 최용건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명의 병력을 투입, 서울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9월 20일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해 있었고 23일에는 대한민국 해병대와 미국 제1해병사단이 현재 서울시 서대문구의 안산을 점령했다.

다음 날에는 한강을 도하, 마포를 통해 시내로 돌입했으며 25일에는 대한민국 육군 제17보병연대와 미국 제7보병사단이 현재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방면을 통해 한강을 도하했다. 조선인민군은 시가전을 치르려 했으나 병력의 대부분이 섬멸돼 끝내 서울에서 퇴각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 개시 약 2주 만인 28일, 제2차 서울 전투로 서울 탈환이 이뤄졌고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 자리에 있었던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됐다.

"거의 결점 없는 작전" 세계 군사학자들 호평
인천 중구 인천 내항 1·8부두에서 열린 제74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식에서 기수단이 대한민국 국기와 6.25전쟁 참전 22개국 국기를 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열세에 있었던 6·25 전쟁의 전황을 단숨에 뒤집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는 후퇴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한국군이 이 작전으로 역전의 카운터를 때림으로써 주도권이 북한군에서 한국군으로 넘어가며 반격의 신호탄을 울렸다. 이후 북한군은 정전협정 때까지 예전 같은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38선 이북과 이남을 오가는 대용량 수송 가능한 교통수단이 모두 서울을 거쳐 갔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성공은 38선 이남의 조선인민군에 대한 보급이 끊긴 것은 물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과 인천-서울의 한국군-유엔군에 포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륙작전 성공 이후 이남의 북한군은 급격히 와해했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군하게 된다.

많은 군사학자가 이 작전을 20세기 역사상 최고의 군사작전이라 평한다. 미국의 군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스펜서 C. 터커는 인천 상륙작전을 "훌륭한 성공이며 거의 결점 없이 실행됐다"고 극찬한 바 있다.

이소은 기자 luckyss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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