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살아 있을까? 시인이 바라보는 예술과 현실 [PADO]
'안내'라는 직업적 업무의 시작과 끝은 과연 무엇일까? 어떤 공간에서 안내를 맡는다는 것은 단순히 방문객이 원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이상의 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항상 불특정 다수에게 스스로의 모습을 노출해야 한다는 사실에 더하여, 연속되는 감정 노동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하는 경험은 안내자의 역할 수행을 힘겹게 만들곤 한다. 무례한 질문에 상냥하게 대답하고 비아냥대는 표정에도 미소로 응대하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듯 느껴지기 일쑤이다. 이런 역할이 주로 여성에게 맡겨지는 이면에는 이들이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태도로 방문객의 공간적 경험을 좀 더 즐겁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불편한 사회적 기대가 깔려 있다.
2024년 퓰리처상 시 부문 최종 후보작이었던 로빈 쉬프(Robyn Schiff)의 <안내 데스크: 서사시>(Information Desk: An Epic)는 실제로 젊은 시절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안내를 담당했던 여성 시인의 경험을 실감 나게 담아낸다. 짤막한 서정시 모음이 아니라 책 한 권 분량의 서사시를 구성함으로써, 쉬프는 박물관의 구석구석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그 공간에서 느꼈던 찬탄, 당혹, 환희, 피로 등 다양한 정서의 역동을 하나의 드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고대 서사시의 영웅이 사라진 자리에는 현대의 일상을 살아가는 한 생활인의 고단한 삶이 녹아 있으며, 시인은 기나긴 역사와 너른 세계를 아우르는 예술품들 사이에서 자신이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온갖 감정들을 맛깔나게 버무려서 전달해 준다.
나는 내 이름표를 떼어 버리곤 했지, 누구든 알아보고
나한테 뭔가 물어보지 않게--마치 겨울방학의
가장 기나긴 날들에 천천히 차가워지는
목소리로 참다 못해서 말할 때처럼,
내가 늘어놓는 엄마 잔소리를 그 애가 충분히 들었을
때에, "나 너네 엄마 아니야"라고--
그리고 나는 걔가 우리 집 거실에서 하듯이
소파에 큰 대(大)자로 드러누웠지,
박물관에서 유일하게 슬픔과 욕망의
거대한 젖꼭지 술 장식 같은 붉은색
자극적인 밧줄로 저지선이 쳐지지
않은 소파에, 그리고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을 읽었어,
브롤리 공녀의 꿈결 같은
초상화 아래에서,
아 공녀여! 나는 왜
그대를 더 가여워하지 않는 것일까?
그대의 이른 죽음, 모두가 입어 보길 원하는
그대의 푸른색 드레스, 그리고 그대 눈꺼풀을
떨구는 그 억제된 슬픔
마치 그대가 약간 취한 것처럼, 아니면
뭔가 대단한 것을 감추고 소리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나도 그대를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너무 부러워,
그대의 오페라 장갑이
방금 오페라에 다녀와서는
무심히 부풀어서 의자 팔걸이에
늘어뜨려진 모습이, 그 의자에 기대어
그대는 드러내고 있지, 장갑을 벗은
길쭉한 손가락들이 점점 가늘어져
너무나도 연약한 손끝으로 이어지는 것을,
그대는 각각의 손끝으로
다른 자물쇠를 골라서
열 개의 서로 다른 배타적 존재의
시간, 중력, 태생, 그리고
돈에 구애받지 않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장 달콤하게 느낄 휴식 시간에 안내 데스크를 떠난 시인은 제일 먼저 이름표부터 떼어 버린다. 시의 다른 부분에서 자신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이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격조 높은 예술품들로 가득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막상 시인은 그다지 우아한 역할을 맡지 못한다. 예의 없는 질문들과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의 시선 등 여러 괴로운 요소들이 안내 데스크에 앉은 젊은 여성을 지속적으로 위축시키기에,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박물관이라는 공간을 즐기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시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열망이 된다. 겨울방학 내내 딸과 씨름하며 엄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그 역할로부터 잠시나마 떠나고 싶어질 때처럼, 시인은 안내자로서의 감정 노동에서 벗어나 박물관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으며 꿈 같은 휴식 시간을 보낸다.
시인이 손에 잡은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은 일상에 환멸을 느끼면서 마음속 깊은 곳의 열망을 추구하는 30대 여성의 삶을 그려낸 소설이다. 그리고, 시인이 누워서 이 책을 읽는 소파 바로 앞에는 1845년에 프랑스의 수상이 된 알베르 드 브롤리(Albert de Broglie)의 아내 폴린느(Pauline)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폴린느 드 브롤리는 왕족의 일원이 아니었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공녀'(princess)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다. 매우 지적이고 아름다웠으나 내성적이었다고 알려진 폴린느 드 브롤리는 35세의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가 의자에 기대 잠시 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아름답게 포착한 초상화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이다.
소설을 읽던 시인은 초상화의 주인공인 브롤리 공녀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상념에 잠긴다. 뭔가 "억제된 슬픔"을 안고 있는 듯 눈꺼풀을 떨군 그녀의 표정은 "대단한 것을 감추고 소리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에, 시인이 느끼는 일상의 답답함과도 상통하는 면을 분명 가지고 있는 듯하다. 각자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르는 두 여성의 일상은 시대적, 문화적 거리를 뛰어넘는 유사성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자신이 왜 브롤리 공녀를 "더 가여워하지 않는지" 궁금해하며 질문을 던질 때, 시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여성의 삶이 지니는 어느 정도의 친연성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초상화 속에 담긴 브롤리 공녀의 모습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이 시에서 이 대목을 흥미롭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이 갑작스러운 '부러움'의 이유이다. 시인이 19세기에 프랑스의 공녀가 가졌던 물질적 부나 사회적 위치, 혹은 화려한 외양 등을 동경하거나 질시하지 않을까 짐작하기 쉽지만, 정작 시인이 그림에서 초점을 맞추는 곳은 브롤리 공녀의 "손"이다. 그녀의 손 자체가 어떤 특별한 모습으로 초상화에 나타나 있어서가 아니라, 시인은 그 손이 "오페라 장갑"을 이제 막 벗어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브롤리 공녀를 부러워한다. 사교를 위한 문화 행사에 참여하는 일정을 끝낸 후 휴식하며 늘어뜨린 그녀의 손이 시인에게는 한없는 질투의 대상이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브롤리 공녀의 손이 "오페라 장갑"을 벗은 채로 초상화 속에 아로새겨져서 영원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시인에게는 부러움을 안겨 준다. 그녀의 손은 영속적인 휴식의 상태에 존재하면서 "시간"이나 "중력"의 구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렇게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브롤리 공녀의 초상화, 그리고 그 속에 형상화된 그녀의 손은 수많은 시공간을 넘나든다. 그녀의 "길쭉한 손가락들"은 열쇠가 되어 각각 "열 개의 서로 다른 배타적 존재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자물쇠"를 마음대로 골라 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태생"이며 "돈"처럼 어떤 특정한 현실 속 인간들의 일상적 삶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에 전혀 구애받지 않은 채, "오페라 장갑"을 방금 벗어던진 브롤리 공녀의 손은 언제까지나 시인이 부러워하는 '휴식'을 구현하면서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떠도는 것이다.
물론 시인은 이 '휴식'의 순간이 결코 브롤리 공녀의 삶 전체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예술 작품에 포착된 찰나가 영원으로 이어진다는 것 자체가 시인에게는 한없는 동경을 가져다준다. 브롤리 공녀의 초상화를 이런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안내 데스크에 앉은 채 감정 노동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로부터 규정된다. 시인이 긴 서사시의 이 대목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박물관에 있는 많은 예술품은 그것을 감상하는 개인의 삶과 대화적 관계를 형성할 때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역설적으로, 짧은 휴식 시간 동안에도 시인은 또 다른 종류의 "안내"를 수행하여 살아서 역동하는 박물관 속으로 독자를 초대하고 예술과 현실에 대한 성찰을 펼쳐 보인다. 어쩌면, 이런 "안내"야말로 박물관의 안내 데스크에 앉아서 감정 노동에 시달리던 시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업무였을지도 모르겠다.
조희정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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