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 몰려든 유엔 학교는 왜 이스라엘의 ‘표적’이 되었나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내 유엔 학교에 연일 폭격을 퍼부으며 이곳에서 구호 활동을 해온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 ‘운르와’가 또 다시 이스라엘의 표적이 되고 있다.
전쟁 후 학교에서 생활해온 피란민 뿐만 아니라 유엔 직원들의 희생도 커지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또 다시 운르와의 ‘하마스 연루설’을 제기하며 폭격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스라엘이 노골적으로 운르와를 겨냥하면서 이 기구와 이스라엘의 75년 ‘해묵은 갈등’에도 관심이 쏠린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중부 누세이라트 난민촌에 위치한 알자우니 학교를 폭격, 최소 18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다쳤다. 지난해 10월 전쟁 발발 이후 이스라엘군이 이 학교를 공격한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로, 운르와가 운영해온 해당 학교는 현재 피란민 대피소로 쓰이고 있다.
사망자 가운데 6명은 운르와 직원이었다.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시작된 이래 단일 공격으로는 가장 많은 유엔 직원이 한꺼번에 사망한 것이다. 유엔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운르와 직원은 220명에 이른다.
유엔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판이 커지자 이스라엘은 또 다시 운르와의 하마스 연루 의혹을 제기했다. 이스라엘군은 이튿날 성명에서 사망자 중 9명이 하마스 대원이며, 이 가운데 3명은 운르와 직원이면서 동시에 하마스 무장대원으로 활동해온 이들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압박에 ‘고사’ 위기 처한 유엔 난민 기구
이스라엘이 운르와의 ‘하마스 연루설’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번 전쟁을 둘러싸고 유엔과 번번이 대립각을 세워온 이스라엘은 전쟁 4개월차에 접어든 지난 1월 말 운르와 직원 12명이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운르와는 이스라엘이 지목한 직원들을 즉각 해고하고 외부 기관의 독립적인 조사를 받겠다고 밝혔으나, 이스라엘은 이 조직의 폐쇄와 국제사회의 지원 중단을 요구했다. 이스라엘 발표 후 4일 만에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 호주 등 서방 18개국이 지원 중단을 결정하며 운르와는 말 그대로 ‘고사 위기’에 처했다.
필립 라자리니 운르와 사무총장이 극소수 몇몇 직원들의 문제로 전체에 대한 지원을 끊는 것은 “가자지구 주민들을 집단 처벌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호소했으나, 소용 없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한 발 더 나아가 운르와 직원 가운데 12% 정도인 1500여명이 하마스와 연계돼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도록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후 미국 정보기관인 국가정보국은 운르와 직원 1000명 이상이 하마스와 연계돼 있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을 확인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이 사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카트린 콜로나 전 프랑스 외교장관이 이끄는 유엔 독립 조사기구 역시 이스라엘이 해당 의혹을 뒷받침할 증거를 수개월째 제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이 하마스 기습 공격 후 3개월 넘게 흐른 시점에서 해당 의혹을 제기한 것을 두고 당시 논란이 됐던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가자 집단학살 방지’ 판결을 무마하기 위한 일종의 ‘여론전’이 아니냐는 평가도 나왔다.
가자 주민들의 ‘생명줄’, 운르와는 어떤 조직?
운르와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교육, 의료, 주거 등 인도적 지원을 하기 위해 1949년 설립된 유엔 산하 구호기관이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지에 흩어져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그들의 후손 600만명을 돕기 위해 75년간 구호 활동을 벌여왔다.
운르와는 3만2000여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다른 유엔 조직과 달리 구호 종사자 대부분이 현지 팔레스타인인이다. 특히 가자지구에 직원 1만3000여명을 두고 있어 이곳에서 가장 큰 고용을 창출하는 조직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전쟁 발발 이후 이 기구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생명선’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로 전체 인구 230만명 가운데 200만명이 운르와를 비롯한 구호기관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번 전쟁으로 집을 잃은 피란민 190만명 가운데 100만명 이상이 운르와의 학교 등 피란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전쟁 전 운르와는 가자 전역에 300여개가 넘는 학교와 보건소, 창고 등 시설을 운영해 왔는데 전쟁 발발 후 갈 곳 잃은 피란민들이 이곳 시설로 모여 들기 시작한 것이다.
운르와는 어쩌다 이스라엘의 ‘눈엣가시’가 되었나
다만 운르와는 유엔 조직 중에서도 매우 특수한 성격과 지위를 갖고 있다. 유엔 난민 관련 조직들 중 팔레스타인인이라는 특정 난민만을 지원하는 유일한 기구이며, 직원의 97%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다른 유엔 직원보다 훨싼 적은 임금을 받고 외교 여권도 받지 못한다.
운르와는 창설 후 75년간 활동해 왔지만 유엔에선 공식적으로 ‘임시’ 조직의 지위를 갖고 있으며 유엔 총회에서 몇 년마다 그 지위를 갱신한다. 유엔의 예산 지원도 적어 나머지는 기부 및 해외 국가들의 지원으로 해결한다. 한 운르와 관계자는 “명목상의 유엔 기구일 뿐”이라고 미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이스라엘은 운르와의 이런 특성을 들며 이 조직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해결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해 왔다. 이스라엘 정부는 운르와가 중립적인 유엔 기관이 아니라, ‘유엔의 외피를 쓴 팔레스타인 조직’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이스라엘은 유엔 난민기구와 별도로 운영되는 운르와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중동 다른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보고 있다. 중동 각국에 흩어져 있는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현재는 이스라엘 영토로 변한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는데, 이스라엘은 여기에 대한 깊은 반감과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은 운르와가 운영해온 학교들이 반유대주의와 무장 투쟁을 조장하며,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반감을 심어왔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유엔 독립 조사기구는 운르와가 가자 학교에서 대대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설파하고 있다는 이스라엘의 주장과 달리, 조사 결과 교육 과정 중 반유대주의적인 텍스트나 이미지는 단 2건만 확인됐다고 밝혔다. 앞서 미 국무부가 2019년 실시한 조사에서도 운르와 학교의 교과서의 3%에서만 ‘반이스라엘적 편견’이 발견됐다.
이스라엘, 8월에만 유엔 학교 16차례 폭격…커지는 ‘전쟁 범죄’ 비판
전쟁 전부터 이 기구의 해체를 요구해온 이스라엘군은 전쟁 이후 운르와가 운영하는 가자지구 전역의 학교를 연이어 폭격하며 반감을 노골화하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8월에만 총 16차례 가자지구 전역에 위치한 학교를 공습했으며, 이 학교들 모두 전쟁 중에 갈 곳을 잃은 피란민들의 대피소로 쓰이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폭격 때마다 학교에 숨어든 하마스 무장세력을 표적 공격했으며 하마스가 피란민을 ‘인간 방패’로 삼고 있다고 주장해 왔지만, 민간인이 밀집한 피란 시설에 대한 폭격이 전쟁 범죄와 다름 없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운르와 직원 6명을 비롯해 18명이 사망한 알자우니 학교는 가자지구 각지에서 몰려든 피란민 1만2000명이 생활하던 곳으로, 이스라엘군은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곳을 다섯 차례나 공습했다. 이스라엘군은 이 공습으로 하마스 조직원 9명을 사살했다고 밝혔는데, 이 주장이 사실이더라도 전체 사망자 가운데 절반인 나머지 9명은 하마스와 무관하게 희생된 민간인이란 얘기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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