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영화 대배우 제나 롤런즈를 기억하며 [영화와 세상사이]
수년간 알츠하이머를 앓아 왔던 미국 배우 제나 롤런즈가 8월14일 세상을 떠났다. 종종 롤런즈는 미국 독립영화계의 아이콘 존 카사베츠 감독의 아내로 소개될 때가 있지만 롤런즈가 남긴 궤적을 들여다본다면 그 소개 문구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롤런즈가 없었다면 남편 존이 연출한 영화들이 지금까지 회자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창작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롤런즈는 1930년 태어나 20대 때부터 영화와 연극, 텔레비전 등 매체 환경을 가리지 않고 연기 활동을 이어갔다. 카사베츠 역시 배우이자 연출자였기에 롤런즈는 남편이 만든 영화에서 때때로 함께 연기를 할 때도 있었다. 그는 남편이 연출한 ‘그림자들’(1959년), ‘얼굴들’(1968년), ‘별난 인연’(1971년), ‘오프닝 나이트’(1977년), ‘글로리아’(1980년), ‘사랑의 행로’(1984) 등 대부분의 영화에 출연했다. 2004년에는 아들 닉 카사베츠가 연출한 ‘노트북’에도 출연해 건재함을 알렸지만 이후 2010년대 들어서는 투병생활 등으로 배우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롤런즈의 출연작을 유심히 살펴볼 때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연출자가 롤런즈가 맡은 배역의 캐릭터나 서사를 정교하게 구축하지 않았다는 것. 이에 따라 관객들은 인물 자체에 몰입할 기회를 얻는 대신 롤런즈라는 배우와 소통하게 된다. 결국 그가 출연하는 영화들은 연기의 영역이 아닌, 현실 속 롤런즈의 개인적인 면모들이 어느정도 반영된 세계다.
남편 카사베츠가 연출을 맡았던 ‘글로리아’를 살펴보자. 이 작품에서 롤런즈는 마피아에게 부모를 잃은 소년을 보호하는 한 여인을 연기했다. 마피아 회계 담당이던 잭은 FBI에 조직의 정보를 흘린 뒤 마피아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가 사는 집에 마피아들이 들이닥칠 위기의 순간, 그의 아내 제리는 옆집 이웃 글로리아에게 어린아이만은 데려가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
카사베츠의 카메라는 벼랑 끝에 몰려 도망치는 여인과 소년을 어떻게 따라갔나. 쫓기는 자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마냥 달라붙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수 구간에서 감독은 길거리든 방 안이든 그 어디든 간에 카메라를 떨어뜨려 놓고 망원렌즈로 줌을 조절해 가면서 이들을 관찰한다. 심지어 각본에서도 카사베츠는 글로리아의 서사를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관객들이 글로리아에 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된다.
사연 많아 보이는 과거를 간직한 채 내 옆에 달라 붙은 골칫덩어리 소년을 보호해야 하는 한 여인. 그런 글로리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때 글로리아를 관객들과 가깝게 이어 붙여 주는 존재가 바로 배역을 소화한 롤런즈의 존재 자체가 아닌가.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길을 끄는 구간이 있다. 아빠의 생사를 걱정하는 여섯 살배기 소년에게 글로리아가 “그냥 꿈이라고 생각해. 자다 보면 꿈에서 죽을 수도 있잖니. 자고 일어나 보면 살아 있고 말이야”라고 둘러대는 장면이 떠오른다. 또 도망치다 묵게 된 숙소에서 글로리아는 소년과 함께 누워 대화하다 소년이 헛소리를 한다고 여겨 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 밑으로 밀쳐 떨어뜨린다. 도무지 아이에게 정을 붙이려고 하지 않는 차가운 글로리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구간이지만 롤런즈의 연기가 이 배역의 언행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셈이다. 관객들은 그의 연기를 보면서 신경질적인 말의 뉘앙스와 그리고 아이를 성가신 듯 바라보는 눈빛이 뒤섞여 있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나이대 중년 여성이 흔히 느낄 법한 모성의 본능 내지는 아이를 향한 연민도 함께 서려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신경쇠약 증상을 지닌 한 가정주부의 삶을 담아낸 ‘영향 아래 있는 여자’나 무대 안팎을 오가는 연극 배우의 고뇌를 조명한 ‘오프닝 나이트’에서 롤런즈가 맡은 인물들도 역시 비슷하다. 서사에는 깊이와 밀도가 없다. 그저 롤런즈에게 의지한 채 영화가 계속되는 것이다. 어쩌면 남편 존은 아내를 믿고 그에게 자유를 부여했을 수도 있다. 옆에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했던 동반자인 남편은 롤런즈의 연기가 틀에 가둬 두기보다는 느슨하게 풀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롤런즈는 남편 카사베츠의 카메라에 여러 차례 담겼고 그 속에서 감정과 몸짓을 마음껏 표출했다. 때로는 정적이고 때로는 동적인 움직임에는 삶과 연기를 오갔던, 영화인으로서 그의 일상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미국 독립영화계를 이끌었던 롤런즈의 필모그래피나 위업 따위가 아니라 스크린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던 그의 눈가주름이나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어야 한다.
송상호 기자 ssh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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