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연하 아내가 동서와 놀아났다”···총격전까지 일으킨 친족 스캔들[사색(史色)]
[사색-79] “‘바람난 부인’ 기사단의 간부로 임명합니다.”
사내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습니다. 방금 그의 이름 앞으로 도착한 익명의 서신 때문이었습니다. ‘바람난 여자’의 남편들이 모인 기사단 간부로 임명한다는 명백한 조롱.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부인을 난잡한 사람으로 음해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처지를 비아냥댄 셈이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해 편지를 찢어 버립니다. 분노는 편지를 불쏘시개라도 삼듯 훨훨 타오릅니다.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발신인은 누구인지, 어떤 의도로 보냈는지. 불현듯 한 작자의 얼굴이 스칩니다. 얼마 전 처제와 결혼한 그놈. 외설스러운 농담을 아내에게 던지던 불한당. 불쾌한 신체 접촉까지 서슴지 않던 파렴치한 인물. 가족 간에 지켜야 할 예의를 전혀 모르는 그 놈을 떠올리며 사내는 생각합니다. “그놈이 이 편지를 보냈을 거야.”
푸시킨의 초상화를 본 사람들은 약간의 의문이 들 수 있겠습니다.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겐 출생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의 외증조 할아버지는 흑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황족으로 살다 오스만 제국의 노예무역으로 납치된 아브람 간니발.
외증손자인 푸시킨이 러시아 귀족이면서도 동시에 ‘검둥이’라는 모멸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자란 이유였습니다. 흑인을 연상시키는 곱슬머리 역시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지요. 훗날 귀족 뒤보르지나는 푸시킨에게 “아프리카 족장”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삶은 날 때부터 푸시킨을 속이고 속여왔던 셈입니다.
그 덕분인지, 그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꽃 피우고 있었습니다. 소박한 민중의 언어와 음식을 귀족인 그가 작품 속에서 자주 구현한 배경이지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예브게니 오네긴’의 한 대목입니다. “나의 욕망은 평화와, 양배춧국 한 사발, 그것도 큰 것으로.”
1812년,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 푸시킨은 황립 귀족 학교 리체이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가 인생을 결정짓는 일들이 숱하게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침략에 맞선 전쟁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파죽지세의 나폴레옹군에 맞선 전투는 고되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만큼 러시아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촉매가 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물러갔지만, 프랑스의 혁명 정신은 러시아에 고이 남았습니다. 푸시킨은 당대 유럽을 휩쓴 프랑스 문학을 탐닉하면서 자유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몸 속에 체화해 나갔습니다. 라 로슈푸코, 볼테르, 장 라신, 샤토브리앙과 같은 문호들의 글을 읽고 또 읽어 나갔지요.
‘남의 것’을 ‘제 것’으로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이 푸시킨에게 있었습니다. 프랑스 문학의 화려한 문체와 서사 구조를 소화해 러시아 색깔을 입혔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는 유려하되 불온했습니다. 권력이 보기에 특히나 그랬습니다. ‘자유의 송가’라는 시의 한 대목입니다. “왕좌는 자연이 아닌 율법이 주는 것. 당신(왕)은 사람들 위에 있지만, 그 위로 영원한 법이 서 있다.” 군주의 자의적 통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엿보이는 문장.
러시아 황실이 푸시킨을 추방할 수 밖에 없던 이유였습니다. 시베리아행이 유력했지만 그가 반체제 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것이 참작되면서 모스크바 남부 베사라비아 지역으로 추방이 결정됩니다. 러시아를 사랑한 애국자이면서 동시에 권력을 불안하게 만드는 자.
푸시킨은 그렇게 유배생활인 ‘남방 유배기’를 시작합니다. 드넒은 남방지역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동이 자유로운 일종의 제한적 여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소설 ‘예브게닌 오네긴’을 쓴 것도 이곳에서 였습니다. 잘생기고 재능이 있지만, 세상에 냉소적이고, 진지한 것을 싫어하는 귀족 청년 오네긴의 이야기. 진지한 사랑을 거부하다 결국 아무 것에도 정착을 못하는 ‘잉여인간’의 전형. 유럽의 향락을 쫓다가 러시아적 가치를 잃어버린 귀족을 에둘러 비판한 작품이었습니다.
푸시킨은 이날을 기억하는 시를 여럿 지었습니다. 이 때부터 러시아 황실은 그의 모든 작품을 검열 후 출간한 것을 명령합니다. ‘해로운 정신’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불온 시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체적 구속과 더불어 그의 정신마저 다락방에 갇힌 셈이었습니다.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권태로운 나날의 연속. 그의 눈에 확 들어오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나탈리아 곤차로바. 16살의 소녀. 큰 키에 화사하고 아름다운 얼굴. 발랄한 성격으로 매력을 뽐내는 여성이었습니다. 166cm에 불과한 푸시킨은 자신보다 8cm나 큰 그녀에게 빠져들었지요. 30살이 다 되어가는 노총각 푸시킨은 당당하게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에 성공합니다.
나탈리아는 처음에 그를 밀어냅니다. 단테스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그녀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탈리아의 여동생 예카테리나에게 청혼하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러시아 사교계에서는 “단테스가 나탈리아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 이를 은폐하기 위해 그녀의 여동생과 위장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푸시킨은 이 편지가 단테스가 보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힙니다. 기사의 정신으로 그에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합니다. 1837년 1월 27일의 일이었습니다. 두 발의 총성이 울린 뒤 쓰러진 건 푸시킨이었습니다. 단테스는 팔에만 가벼운 상처를 입었습니다.
푸시킨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신에게 다가서고 있을 때 그는 모든 증오를 내려놓습니다. 병상 옆에서 울고 있는 아내 나탈리아에게 그는 조용히 읊조렸습니다. “당신이 결백함을, 제 온 마음을 다해 믿습니다.”
하인을 시켜 단테스에게도 편지를 보내 그의 행동을 용서하겠다고 전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프거나 노여워 않았던 사내. 러시아의 영혼이라 불린 그는 순수함만을 간직한 채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푸시킨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1880년 6월 8일 모스크바. 이곳에 수많은 청중이 몰렸습니다. ‘푸시킨 탄생 80주년 기념 동상 제막식’이 열려서였습니다. 연단에 오른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의 동포가 된다는 것. 이를 증명한 사람이 푸시킨이었습니다. 그는 예언자였고, 어두운 밤길의 환한 등불이었습니다.”
거친 삶 속에서도 결코 용서만을 품고 간 사내의 이야기. 그가 남기고 간 시를 여러분께 전합니다. 추석은 무릇 슬픔과 노여움을 내려놓아야 하는 날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프거나 노여워 말라우울한 날을 견디면기쁨의 날 오리니마음은 미래에 살기에현재는 언제나 우울한 것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지나간 모든 것은 그리움이 되리라
ㅇ알렉산데르 푸시킨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통하면서도 극적인 삶으로 유명했다.
ㅇ흑인의 후손 출신 귀족인 그는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프랑스 문학에 통달했다.
ㅇ프랑스 문학을 기반으로 러시아 색깔을 입혀 러시아의 국민 작가가 됐다.
ㅇ10살 연하의 아내에게 추파를 던진 남자와 총격전을 벌이다 죽음을 맞았다.
<참고 문헌>
ㅇ이현우,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현암사, 2014년
ㅇ김상현, 푸쉬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타난 러시아성 주제 구성의 시학, 노어노문학 제31권 1호,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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