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연하 아내가 동서와 놀아났다”···총격전까지 일으킨 친족 스캔들[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9. 14. 12:1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색-79] “‘바람난 부인’ 기사단의 간부로 임명합니다.”

사내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습니다. 방금 그의 이름 앞으로 도착한 익명의 서신 때문이었습니다. ‘바람난 여자’의 남편들이 모인 기사단 간부로 임명한다는 명백한 조롱.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부인을 난잡한 사람으로 음해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처지를 비아냥댄 셈이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해 편지를 찢어 버립니다. 분노는 편지를 불쏘시개라도 삼듯 훨훨 타오릅니다.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발신인은 누구인지, 어떤 의도로 보냈는지. 불현듯 한 작자의 얼굴이 스칩니다. 얼마 전 처제와 결혼한 그놈. 외설스러운 농담을 아내에게 던지던 불한당. 불쾌한 신체 접촉까지 서슴지 않던 파렴치한 인물. 가족 간에 지켜야 할 예의를 전혀 모르는 그 놈을 떠올리며 사내는 생각합니다. “그놈이 이 편지를 보냈을 거야.”

“내...내가 이렇게 쓰러지다니.” 푸시킨과 단테스의 결투. 알렉세이 나우모프의 1884년 작품.
두 달 뒤, 스산한 공터에서 두 남자가 서로에게 총을 겨눕니다. “타당”. 총성이 울리고 쓰러진 건, 그 사내였습니다. 1837년 전 러시아를 뒤흔든 총격전. 쓰러진 남자의 이름은 알렉산데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프거나 노여워 말라’는 글귀로 유명한 시인이었습니다.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푸시킨은 한 발의 총성에 스러져갔습니다. ‘러시아의 영혼’이라고 불린 사내의 마지막은 그의 문학만큼이나 극적이었습니다.
귀족임에도...차별받은 푸시킨
“검둥이 집안.”

푸시킨의 초상화를 본 사람들은 약간의 의문이 들 수 있겠습니다.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겐 출생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의 외증조 할아버지는 흑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황족으로 살다 오스만 제국의 노예무역으로 납치된 아브람 간니발.

“흑인 소년이라...독특한 선물이군.” 표트르 대제는 흑인 소년 간니발을 선물 받은 뒤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와 흑인 소년을 묘사한 그림.
운명처럼 그는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눈에 띄었습니다. 황실의 지원 덕분에 장군까지 지낸 그는 러시아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 살 수 있었지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그의 첫 부인은 그 몰래 바람을 피우고 사생아까지 낳았습니다. 다행히도 두 번째 결혼에서는 간니발을 마음 깊이 사랑해주는 여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외증손자인 푸시킨이 러시아 귀족이면서도 동시에 ‘검둥이’라는 모멸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자란 이유였습니다. 흑인을 연상시키는 곱슬머리 역시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지요. 훗날 귀족 뒤보르지나는 푸시킨에게 “아프리카 족장”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삶은 날 때부터 푸시킨을 속이고 속여왔던 셈입니다.

“왜 나를 이렇게 놀리는 거지.” 어린 시절의 푸시킨.
귀족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유모에게 맡겨진 채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유모와 하인은 그에게 어머니 아버지와 다름없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그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꽃 피우고 있었습니다. 소박한 민중의 언어와 음식을 귀족인 그가 작품 속에서 자주 구현한 배경이지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예브게니 오네긴’의 한 대목입니다. “나의 욕망은 평화와, 양배춧국 한 사발, 그것도 큰 것으로.”

푸시킨의 어머니 나데즈다 간니발. 그는 푸시킨의 양육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전쟁, 대문호를 키우다
“러시아를 나폴레옹으로부터 지키자.”

1812년,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 푸시킨은 황립 귀족 학교 리체이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가 인생을 결정짓는 일들이 숱하게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침략에 맞선 전쟁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파죽지세의 나폴레옹군에 맞선 전투는 고되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만큼 러시아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촉매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러시아를 보호합시다.” 1815년 학교에서 시를 낭송하는 푸시킨.
6개월의 전쟁 끝, 승리자는 러시아였습니다.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을 첫 번째로 무릎 꿇린 나라로서 자부심도 컸었지요. 푸시킨의 마음 속에서도 조국에 대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합니다.이 때 쓴 자작시 ‘차르스코예 셀로에 대한 회상’으로 그는 학교 최고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러시아 대표시인인 가브릴라 데르자빈은 “너는 장래에 위대한 시인이 될 거다”라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물러갔지만, 프랑스의 혁명 정신은 러시아에 고이 남았습니다. 푸시킨은 당대 유럽을 휩쓴 프랑스 문학을 탐닉하면서 자유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몸 속에 체화해 나갔습니다. 라 로슈푸코, 볼테르, 장 라신, 샤토브리앙과 같은 문호들의 글을 읽고 또 읽어 나갔지요.

“나폴레옹이 이 눈발에 무너질쏘냐.”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은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그는 볼테르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새로운 길을 따라간 최초의 사람이며 철학의 등불을 역사의 어두운 기록 보관소로 가져온 사람”. ‘나폴레옹 전쟁’이 푸시킨에게 러시아에 대한 애국심과 프랑스 문학에 대한 존중을 동시에 심어준 셈이지요. 전쟁은 이렇듯 많은 걸 파괴하고, 또 동시에 창조합니다.

‘남의 것’을 ‘제 것’으로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이 푸시킨에게 있었습니다. 프랑스 문학의 화려한 문체와 서사 구조를 소화해 러시아 색깔을 입혔기 때문입니다.

불온세력으로 낙인찍힌 푸시킨
“푸시킨을 추방하라.”

그의 시는 유려하되 불온했습니다. 권력이 보기에 특히나 그랬습니다. ‘자유의 송가’라는 시의 한 대목입니다. “왕좌는 자연이 아닌 율법이 주는 것. 당신(왕)은 사람들 위에 있지만, 그 위로 영원한 법이 서 있다.” 군주의 자의적 통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엿보이는 문장.

“러시아적인 건 무엇일까.” 젊은 시절의 푸시킨.
러시아 제국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모임 ‘데카브리스트’(12월의 사람들. 12월에 봉기를 일으키면서 붙여진 이름)는 ‘자유의 송가’를 품은 채 변혁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민중의 삶과 자유에 관심이 많은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들과 꾸준히 교류하곤 했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던 유모, 하인, 농부의 삶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지요. 인간의 고통을 포착하는 건 언제나 문인(文人)의 기본 소양이었습니다.

러시아 황실이 푸시킨을 추방할 수 밖에 없던 이유였습니다. 시베리아행이 유력했지만 그가 반체제 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것이 참작되면서 모스크바 남부 베사라비아 지역으로 추방이 결정됩니다. 러시아를 사랑한 애국자이면서 동시에 권력을 불안하게 만드는 자.

푸시킨은 그렇게 유배생활인 ‘남방 유배기’를 시작합니다. 드넒은 남방지역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동이 자유로운 일종의 제한적 여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새로운 풍경에 새로운 구상이 떠오르는군. ” 바다 위에 선 알렉산데르 푸시킨.
유배지에서 쏟아낸 문학들
권력은 그에게 벌을 주고자 했지만, 오히려 문인으로서 문학적 토양은 더욱 비옥해져 갔습니다. 새로운 풍경은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푸시킨이 ‘코카서스 포로’, ‘남부 시 시리즈’를 완성한 것이 이곳에서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소설 ‘예브게닌 오네긴’을 쓴 것도 이곳에서 였습니다. 잘생기고 재능이 있지만, 세상에 냉소적이고, 진지한 것을 싫어하는 귀족 청년 오네긴의 이야기. 진지한 사랑을 거부하다 결국 아무 것에도 정착을 못하는 ‘잉여인간’의 전형. 유럽의 향락을 쫓다가 러시아적 가치를 잃어버린 귀족을 에둘러 비판한 작품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지루하기 짝이 없지...” 겉멋 든 귀족 청년을 잉여인간의 전형으로 구현된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 1908년 작품의 삽화.
러시아 문인들이 문학의 도덕적 역할을 강조한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푸시킨이 러시아의 영혼이라고 불린 배경이었습니다. 그의 몸은 남부 크림반도에 머물렀지만, 그의 명성은 이제 전 러시아의 것이었습니다.
푸시킨의 친구들 데카브리스트들의 봉기
수도로부터 가슴 떨리는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1825년 12월 14일, 데카브리스트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킵니다. 황제 알렉산데르 1세가 죽고 동생 니콜라이1세가 즉위하려는 권력 공백기에 일어난 반란. 그러나 원대한 꿈은 밀고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자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새로운 세상을 꿈 꾼 이들은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푸시킨의 시를 금과옥조로 여기던 그 사람들, 농노제 폐지로 농민의 삶이 나아지기를 꿈꾼 그 친구들.

푸시킨은 이날을 기억하는 시를 여럿 지었습니다. 이 때부터 러시아 황실은 그의 모든 작품을 검열 후 출간한 것을 명령합니다. ‘해로운 정신’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불온 시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체적 구속과 더불어 그의 정신마저 다락방에 갇힌 셈이었습니다.

“자 반란을 진압할 시간이다.” 근위대를 사열하는 니콜라이 1세.
뮤즈인가 악녀인가...푸시킨의 잘못된 사랑
“저와 결혼해줄 수 있겠소.”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권태로운 나날의 연속. 그의 눈에 확 들어오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나탈리아 곤차로바. 16살의 소녀. 큰 키에 화사하고 아름다운 얼굴. 발랄한 성격으로 매력을 뽐내는 여성이었습니다. 166cm에 불과한 푸시킨은 자신보다 8cm나 큰 그녀에게 빠져들었지요. 30살이 다 되어가는 노총각 푸시킨은 당당하게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에 성공합니다.

“작가 아저씨와의 결혼 괜찮을까.”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발랄한 소녀와 진지한 문인의 조합은 시작부터 어긋납니다. 그녀는 결혼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사교계에서 만난 남성들과 대화를 즐기면서 겉돌기 시작한 것이지요. 푸시킨의 우려에도 그녀는 도통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가벼움을 알아채고 등장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장교 조르주 단테스였습니다. 타고난 바람둥이인 그가 그녀의 헤픈 성격을 알고 유혹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나탈리아는 처음에 그를 밀어냅니다. 단테스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그녀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탈리아의 여동생 예카테리나에게 청혼하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러시아 사교계에서는 “단테스가 나탈리아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 이를 은폐하기 위해 그녀의 여동생과 위장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오늘은 어떤 여자를 꼬셔볼까. ” 조르주 단테스.
푸시킨의 속은 을 대로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작품이 검열에 묶여 있는 탓에 가세가 기울고 있는 와중에, 아내의 외도 소문이라니. 거기에 동서지간이 되어버린 단테스 그 놈과. 때 마침 도착한 서신에는 “바람난 여인들의 기사단 간부”라는 조롱성 문구가 쓰여있었습니다.

푸시킨은 이 편지가 단테스가 보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힙니다. 기사의 정신으로 그에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합니다. 1837년 1월 27일의 일이었습니다. 두 발의 총성이 울린 뒤 쓰러진 건 푸시킨이었습니다. 단테스는 팔에만 가벼운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 저 놈을 다시 쏴야해” 푸시킨의 마지막 결투.
대문호의 마지막 메시지는 ‘용서’였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푸시킨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신에게 다가서고 있을 때 그는 모든 증오를 내려놓습니다. 병상 옆에서 울고 있는 아내 나탈리아에게 그는 조용히 읊조렸습니다. “당신이 결백함을, 제 온 마음을 다해 믿습니다.”

하인을 시켜 단테스에게도 편지를 보내 그의 행동을 용서하겠다고 전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프거나 노여워 않았던 사내. 러시아의 영혼이라 불린 그는 순수함만을 간직한 채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푸시킨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임종을 맞은 푸시킨.
푸시킨은 러시아 문학의 전범이었습니다. 후대 글쟁이들은 모두 그의 글과 서사를 곱씹었습니다. 푸시킨을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도 없었을 것입니다.

1880년 6월 8일 모스크바. 이곳에 수많은 청중이 몰렸습니다. ‘푸시킨 탄생 80주년 기념 동상 제막식’이 열려서였습니다. 연단에 오른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의 동포가 된다는 것. 이를 증명한 사람이 푸시킨이었습니다. 그는 예언자였고, 어두운 밤길의 환한 등불이었습니다.”

거친 삶 속에서도 결코 용서만을 품고 간 사내의 이야기. 그가 남기고 간 시를 여러분께 전합니다. 추석은 무릇 슬픔과 노여움을 내려놓아야 하는 날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프거나 노여워 말라우울한 날을 견디면기쁨의 날 오리니마음은 미래에 살기에현재는 언제나 우울한 것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지나간 모든 것은 그리움이 되리라
러시아의 영혼으로 불리는 알렉산데르 푸시킨.
<네줄요약>

ㅇ알렉산데르 푸시킨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통하면서도 극적인 삶으로 유명했다.

ㅇ흑인의 후손 출신 귀족인 그는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프랑스 문학에 통달했다.

ㅇ프랑스 문학을 기반으로 러시아 색깔을 입혀 러시아의 국민 작가가 됐다.

ㅇ10살 연하의 아내에게 추파를 던진 남자와 총격전을 벌이다 죽음을 맞았다.

<참고 문헌>

ㅇ이현우,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현암사, 2014년

ㅇ김상현, 푸쉬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타난 러시아성 주제 구성의 시학, 노어노문학 제31권 1호, 2019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격주 주말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