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의 산증인 부산항, 그곳에 꿈결 같은 사진들이 떠돈다
근현대기 이 땅의 역사를 만들었던 옛 창고 터에 꿈결 같은 사진들이 떠돈다.
부산시 중구 중앙동4가를 주소로 지닌 부산항 제1부두에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의미를 지닌 창고가 하나 있다. 일제가 이 땅에서 빼앗아간 물자들과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풀어낸 군수품들, 기업들이 1960~80년대 수출입국을 목표로 야적한 수출상품 등이 가득 들어와 쌓였던 곳이다. 112년 전인 1912년 처음 만든 이래 계속 확장된 부산항 제1부두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의 옛 창고 터에 1970년 들어선 이 창고 건물 안에는 지난달부터 기기묘묘한 사진가들의 수작들이 채워졌다. 숱한 세월과 역사의 풍상을 겪은, 천장 높고 퀭한 공간 속에 몽롱한 분위기가 감도는 국내외 사진가들의 작품들이 곳곳에 내걸려 있다.
‘한여름밤의 꿈’이란 주제를 내걸고 지난달 22일 개막한 ‘2024 부산국제사진제’의 전시 현장이다. 사진기획자 석재현씨가 전시감독이 되어 꾸린 이번 사진제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의식 내면을 좇는 초현실적 사진, 표현주의적 사진 등에 초점을 맞춘 국내외 작가들의 기획전으로 비친다. 핵심은 세계적인 사진 대가로 꼽히는 로저 발렌을 비롯한 국내외 중견사진가 8명이 참여한 주제전이다. 발렌은 미국 출신으로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살면서 쥐와 새 등이 말하지 않는 화자나 관찰자로 등장하는 독특한 구도의 초현실적 사진으로 세계 사진계에서 유명해졌다.
‘내면의 극장’이란 전체 제목을 단 그의 전시 영역은 ‘로저, 혼돈의 쥐’ ‘환영들의 무대’ ‘새들의 수용소’란 세 연작들로 구성된다. 그의 전시장에는 사람과 동물 유령이 뒤엉킨 충격적이고 몽환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혼돈을 상징하는 쥐가 사람의 몸으로 옷을 입은 채 마네킹이나 사람의 목과 몸을 자르거나 해체하고 고문하는 듯한 ‘…혼돈의 쥐’ 연작 장면들과 유령의 확대된 실루엣이 사람들 위로 스멀거리는 휘장들이 나부끼는 ‘환영…’ 연작, 벽에 자잘하게 남은 사람들의 낙서나 몸의 일부만을 드러내며 절규하는 동물과 사람들을 배경으로 날아가거나 거닐고 있는 새들의 모습을 담은 ‘새들의…’ 연작이 등장한다. 세상에 대한 인간 내면의 공포와 불안, 분노 등의 이미지를 연극적 상황으로 드러내는 심리극 무대의 특징을 보여주면서 인간적인 삶에 대한 작가의 갈망을 표출한다.
광고·패션 사진으로 일가를 이뤘고 최근에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해 한국의 시공간을 살펴보는 작업을 시도해온 김용호 작가의 근작들도 눈길을 끈다. ‘서울 벌레에 대하여’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풍의 조어인 ‘더 베르미스 서울리스’라는 자신의 스틸무비 영화에 들어간 4000여장의 사진 컷들 가운데 일부를 전시장에 걸었다. 이 사진들은 호랑이와 토끼 가면을 쓴 채 자신의 도시 공간을 떠나려는 한국인을 주인공 같은 캐릭터로 등장시킨다. 이들이 고도성장의 흔적이 남은 서울을 배회하다가 결국 다시 아파트로 돌아온다는 설정을 담아 배치하면서 귀환과 회귀, 윤희의 여러 개념들을 현대 한국의 도시 환경 속에서 상징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구도를 보여준다.
이외에도 미술관 명화 사이 관객의 모습을 유령처럼 비춘 안드레스 베르테임과 빛으로 자연의 동식물을 환상적으로 조명하는 이정록 작가, 낙원과 현실의 풍경을 가상의 세계 속에서 중첩시키는 원성원 작가, 새들의 군무를 인상적으로 담은 요하네스 보스그라 등의 작품들이 리사 암브로시오, 토마스 라자르의 집요하고 섬뜩한 개인적 시선의 작업들과 어우러졌다. 작가마다 독특한 시각과 촬영의 어법으로 뿜어내는 초현실적 풍경들이 색다른 묘미를 자아낸다.
특별전 ‘리 앤 디스커버리(Re & Discovery)-부산의 사진가들’은 부산 사진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원로 중견 사진가 최부길·이계영씨의 작품들을 추려 내보이는 중이다. ‘자유전’에서는 공모로 뽑힌 현지 작가 16명과 단체 7팀의 작품들이 나왔다. 출품작들은 사진 외에도 영상, 설치작품 등 다양한 형식으로 만날 수 있다. 전시는 22일까지.
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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