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성 포기한 굴욕 외교” vs “강제성 포기한 거 아냐”…일본 사도광산 후폭풍 지속

정희완 기자 2024. 9. 14. 09:1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시물에 ‘강제’ 명시적 표현 없어
정부·여당 “강제성 포기하지 않아”
일, 2015년 군함도 때 ‘강제노동’ 인정
군함도 등재 때 약속 지지부진, 재연되나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활동가들이 지난 7월31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 부정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와 관련해 윤석열 정부의 대일 굴종외교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일본 사도광산이 지난 7월 말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한달 반이 지났지만 후폭풍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협상을 통해 등재에 찬성했지만,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조치가 미흡하다는 비판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와 야당은 협상의 결과물에 한국인 노동의 강제성을 드러내는 표현이 빠졌다며 “정부가 강제성을 포기한 굴욕 외교”라고 지적한다. 반면 정부와 여당은 “강제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반박한다.

전시물에 ‘강제’ 표현 없어…일본이 거부

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 7월27일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한 회의에서 일본 니가타현의 사도광산을 세계유산 목록에 올리기로 최종 결정했다. 한국을 비롯한 21개 위원국은 투표 없이 등재에 모두 동의했다. 애초 일본은 사도광산을 세계유산 등재에 신청할 때, 시기를 에도시대(1603~1868)로 한정했다. 이 때문에 1939~1945년 당시 한국인 1500~2000여명이 강제동원된 역사를 지우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세계유산위 등재 결정에 앞서 전문가 자문기구는 일본 측에 강제동원이 포함된 ‘전체 역사’를 알리는 시설물을 설치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 정부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일본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 결과 정부는 등재에 찬성하는 조건으로 일본이 한국인 노동자의 역사를 알리는 전시물 설치 등을 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은 사도시 내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한국인 노동자의 역사를 알리는 전시를 설치키로 했다. 특히 전시는 사도광산의 등재가 결정된 바로 이튿날부터 공개를 시작했다. 일본이 등재 전부터 전시를 준비해 ‘선조치’를 한 것이다. 일본이 2015년 군함도 등의 세계유산 등재 때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바 있어, 이번 사도광산 관련 전시는 진전된 조치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 평가는 오래 가지 못했다. 문제는 전시 내용물이었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강제동원된 과정과 노동 내용, 탈출과 수감 기록 등이 게재됐다. 그러나 전시 내용에 ‘강제’라는 단어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부와 대통령실은 명시적인 강제성 표현이 없더라도, 내용 전체를 구체적으로 보면 강제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시에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 및 기타 관련 조치’에 의해 ‘징용’이 시행됐다는 내용 등은 보기에 따라 강제동원이 일본 법령에 따른 합법적 노동이라고 읽힐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런 상태에서 강제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한국인 피해자의 증언도 전시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는 일본과 협상 과정에서 ‘강제’라는 표현과 피해자 증언을 포함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이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협상 실패”, “굴욕 외교” 등의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특히 학생 등 미래세대가 이처럼 ‘강제’라는 표현이 빠진 전시물만 보고 강제동원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겠냐는 지적이 나왔다. 차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1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우리 아이들과 학생들에게 이 정도밖에 못 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은 없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100% 받아내지 못한 거에 대해 당연히 미안하게 느낀다”고 말했다.

“2015년 강제성 계승”…외무상은 “강제노동 의미 아냐”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이번 사도광산 등재 협상에서 “강제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는 일본 측 대표가 지난 7월 말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 발언 때문이다. 그는 회의에서 “정부는 그간 세계유산위에서 채택된 모든 관련 결정과 이에 관한 일본의 약속들을 명심(bearing in mind)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대표는 ‘강제노역’이나 ‘강제동원’ 등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간 세계유산위에서 채택된 모든 관련 결정과 이에 관한 약속’에는 일본이 2015년 ‘강제노역’을 인정한 발언이 포함된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조태열 외교부장관이 지난 10일 국회 본회의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의원질의에 답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일본은 2015년 군함도 등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때 “수많은 한국인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끌려와 가혹한 조건 하에 강요된 노동(forced to work)을 했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등재 결정문의 각주에 실려 결정문의 일부로 간주된다. 당시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내고 “한국인들이 강제로 노역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일본으로 하여금 사실상 최초로 언급하게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즉 이번 사도광산 등재 때 일본이 ‘강제노역’을 인정한 2015년 발언을 ‘명심하겠다’고 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이 강제노동을 이번에도 인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관련 질의에 “2015년 군함도 합의할 때 강제성과 가혹한 환경을 적시했고, 군함도에서 얘기한 걸 (이번 사도광산 등재에서도) 다 승계했다”고 말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도 같은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조 장관은 과거 군함도 등재 때 외교부 2차관으로서 공동대표를 맡아 일본과의 협상에 임한 경험이 있다.

일본이 2015년에 ‘강제노역’을 인정했던 것일까. 일본 측 대표가 당시 세계유산위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끌려와 가혹한 조건 하에 강요된 노동을 했다”고 밝힌 직후 기시다 후미오 당시 외무상(현 총리)은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forced to work는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일본은 해석을 달리한 것이다. 일본은 2021년 각의(국무회의) 결정에서 ‘강제연행’ 등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으며 ‘징용’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는 답변서를 결정했다. 징용은 전시에 일본 정부가 적법하게 동원했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군함도 때 약속, 9년 지나도록 제대로 안 지켜

한·일은 사도광산 등재 협상에서 한국인 노동자를 추모하는 추도식을 매년 7~8월 개최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최근 국회 외통위 전체회의에서 9월 내에 열리기는 힘들다고 밝혔다. 조 장관은 연내에는 열릴 것이라고 말했지만, 일본이 군함도 때처럼 약속을 어기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016년 8월 조선 청년들이 탄광 노역한 군함도 일본 나가사키현 섬 ‘하시마’에 1916년 지어진 철근콘크리트 주택이 부식돼 있다. 이준헌 기자

일본은 2015년 군함도 등재 당시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의 역사를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은 군함도 등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소개하는 ‘산업유산 정보센터’를 5년이 지난 후에야 개관했다. 센터의 위치도 군함도에서 980㎞ 떨어진 도쿄 신주쿠구 총무성 제2청사 별관이다. 전시물에서 한국인을 향한 차별이나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각하지도 않았다. 9년이 지나도록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부도 일본의 이런 조치가 상당히 미흡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세계유산위원회도 2021년 일본이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는 않는 것을 두고 “강하게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유산위의 결정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재나 벌칙이 가해지는 건 아니다.

사도광산을 둘러싼 비판과 논란은 정부의 대일 외교 기조와 맞물리면서,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