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스터드 보름달’ 보며, 버릴 것과 남길 것 구분해 보기를
고독과 사색의 힘
닷새간 이어지는 추석 연휴 첫날에 올리는 글이네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조민진입니다. 독자님들이 한가위 보름달에 빌 소원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달을 보며 소원을 빈다면 우린 아마도 고요 속에 있을 것 같습니다. 깜깜한 밤하늘에 떠 있는 커스터드색 달을 보며 속으로 희망을 말하겠지요. ‘커스터드색 달’이라는 표현은 에쿠니 가오리의 오래전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처음 본 뒤로 즐겨 따라 씁니다. 달을 보며 달콤하고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빵을 연상하게 되는데, 빵을 좋아하는 제겐 무척 매력적인 묘사거든요.
하지만 아무래도 달은 빵보다는 친구에 비유하는 게 낫겠습니다. 조선 시대 시인 윤선도를 따라서요. 그는 ‘오우가’에서 자신의 다섯 친구로 물과 돌,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달을 꼽았었지요. 특히 달에 대해선 말 없는 미덕을 칭송했습니다.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 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는 대목이지요. 운치 있는 시조를 마주하니 저도 과묵한 달을 벗 삼아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집니다. 잠시 일상을 잊고 홀로 사색에 잠기는 시간에 말이지요.
혼자일 때 영광스러운 게 고독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니,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쪽이지요. 혼자서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때로는 술도 한잔 마시고요. 그렇게 혼자 있어보면 내가 나와 좀 더 친밀해진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며 ‘자기 대화’가 이어지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맥락에서 긴 인생에서도 이따금 스스로 호흡을 고르는 여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특히 새로운 꿈을 꾸거나 방향을 바꾸는 전환기에 있다면, 마치 공연 중간에 쉬는 시간인 ‘인터미션’ 격으로 말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에서든 희극에서든 ‘세상은 무대이고 우리는 배우이며 삶은 연극’이라는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가련한 배우…. 자신이 할당받은 시간만큼 무대 위에서 서성거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디론가 사라져야 하지”(‘맥베스’)라든지 “세상을 무대로 여긴다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지”(‘베니스의 상인’)와 같은 대사에 고개를 끄덕이노라면 연극의 막과 막 사이, 배우와 관객에게 주어지는 짧은 휴식 시간의 유용함도 함께 헤아리게 되지요. 이번 글의 주제는 ‘무대 뒤 고독과 사색’입니다. 인생을 좋은 극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적 시간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먼저 고독에 관한 얘기입니다. 여기서 고독은 외로움과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둘의 차이에 대한 언급을 읽은 적 있는데 소개해드릴게요. “혼자 있어서 고통스러운 건 외로움이고, 혼자 있어서 영광스러운 건 고독이다.”
히틀러 정권이 추방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일 신학자 파울 틸리히의 말입니다. 홀로 있어 영광스러울 만큼 고독한 시간은 어떤 걸까요?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의 ‘생각 주간’(Think week)쯤 될 것 같습니다. 읽을 책만 싸 들고 홀로 머물며 새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향후 전략을 짜는 시간이라지요. 셰익스피어에 따르면 게이츠 역시 ‘무대 위 배우’일 테니 생각 주간에 들어간 그는 흡사 인터미션 때 대기실의 배우 같기도 합니다. 대기실의 배우는 다음 막을 준비하는 데에 몰입하겠지요. 삶 속에서 영광스러운 고독의 시간은 설령 물리적으로 쉬고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생의 전진을 위한 시간입니다. 혼자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점검하는 시간이죠. 최고의 연주자들은 ‘혼자 연습하기’를 가장 중요하게 꼽는다는 걸 ‘콰이어트’(수전 케인 지음)에서 읽었습니다.
고독과 붙어 다니는 사색에 대해 좀 더 얘기하겠습니다. 고독의 의미가 사색에 있다는 취지에서요. ‘욕망을 줄여 고통을 덜라’고 했던 19세기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사색과 쓰기, 독서에 대해 언급한 대목들을 묶은 ‘쇼펜하우어 문장론’이라는 책을 오래 소장 중인데요, 제가 글쓰기 강의를 할 때면 거듭 생각할 것을 독려하면서 여기 나오는 문장을 자주 인용합니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를 통해 사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독서는 어디까지나 타인이 행한 사색의 결과”라는 점을 짚었습니다. 언제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 사색해서 자기 의견을 정립하는 일임을 강조한 거였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이전에 ‘생각하는 사람’(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생깁니다. 인생을 연극으로 본 셰익스피어의 세계관도 분명 사색의 결과였겠지요. 각자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개인의 세계관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사색을 유도하는 방법론으로 읽기와 쓰기를 권합니다.
생각하는 사람, 호모 사피엔스
사색할 때 중요한 것을 덧붙이겠습니다. 의미 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을 판별하는 일입니다. 의미와 무의미의 대상은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저마다 다른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니까요. 자신의 삶에서 덜 중요하고 필요 없는 걸 덜어내고, 더 중요하고 필요한 일에 생각과 행동의 에너지를 투입하기 위함이 사색의 궁극적 목적인 것 같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해야 할 것과 말아야 할 것,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해 삶을 보다 가볍고 산뜻하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요. 마치 조각칼을 쥔 장인이 된 듯 일상을 다듬는 사색을 이어간다면 마침내 삶의 지향점을 찾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그 지향점은 생의 의미가 되겠네요.
수년 전 읽었던 책 ‘혼자 있는 시간의 힘’(사이토 다카시 지음)을 다시 펼쳐봤습니다. 비교적 쉽게 읽히는 자기계발서지요. 책장을 휘리릭 넘기다가 밑줄 쳐둔 대목에 눈이 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전우라 생각하고, 전우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던 지난날의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은 자기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나는 나의 전우입니다. 고군분투하는 세월 내내 늘 함께하는 전우는 바로 자기 자신이지요. 혼자서 고독할 뿐 외롭진 않은 이유입니다. 이번 연휴엔 커스터드색 달 아래서 가장 오랜 전우와 고독의 영광을 누리는 시간도 만들어볼까요?
작가
신문·방송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지금은 작가나 강사로 불립니다. 꿈꾸며 노력하는 여러분께 말과 글로 힘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아, 유튜브(‘조민진의 웨이투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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