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시대와 도구적 인간들 [주말을 여는 시]

하린 시인 2024. 9. 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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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서효인 시인 ‘헤르체고비나 반성문’
이국적 공간에서 느껴지는 공감대
세계 공통의 정서가 말하는 고백
도구가 돼버린 전쟁 속 인간들

헤르체고비나 반성문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참호를 만듭니다
삽의 끝이 점점 둥그렇게 변합니다
삽을 쥔 손가락이 삽이 됩니다
손을 달고 있는 팔이 삽이 됩니다
팔을 지탱하는 몸통은 진즉에 삽입니다
허리가 삽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삽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삽이라서 죄송합니다

참호의 방향은
오전 10시 어머니의 심정처럼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어
그냥 밑으로 파고들기로 합니다
이삿날의 침대 밑이랄까
최후의 5분이랄까
인종 청소랄까
빵을 위한 새벽의 긴 줄이랄까
친절을 가장한 린치랄까
군인 앞에 선 추녀 이교도랄까
유기견의 성대랄까
상상해서 죄송합니다
말이 많아 잘못했습니다
삽이 된 몸이 총자루를 꼭 그러모으고
언 땅에 머리를 박습니다
차마 아무도 쏠 수가 없고 해서

밑으로 열심히 파고들기로 합니다
우리의 종교는 삽에게 알몸을 내어주던
땅 아래에 있었군요 가만히
서로의 바닥을 봅니다

참호 안에서 우리끼리
죄송하다고 말하고
괜찮다고 대답해봅니다

서효인
· 2006년 '시인세계' 데뷔
· 김수영문학상 등 수상
· 「여수」 등 다수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민음사, 2011.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사진=펙셀]

제30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서효인 시인의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은 '신리얼리즘'의 선두주자라는 인식을 전달한다. 리얼리즘의 스케일이 크고 다분히 정치적이면서도 정치적이지 않은 '산문적이면서 시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자유로운 진폭으로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이나 비인권지역을 오가며 거시적인 폭력이나 이기적인 욕망 등을 풍자 기법으로 재미있게 시화한다. 위트의 시학이라고 볼 수 있다. 위트의 시학을 펼치면서 시인은 일부러 멋을 부리거나 감각적인 언어로 치장하지 않는다. 지극히 산문적인, 그러나 지극히 시적인 리듬을 가지고 직설적이면서 담백한 언어로 시적 정황을 진정성 있게 표출한다.

21세기 한국에 사는 우리는 이국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시들을 많이 접한다. 그런데 이국적 소재를 끌어온 시들에서 공감대를 느끼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시인이 이국적인 배경을 한국적 정서로 치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적 '전략' 없이 처음 느낀 정서 그대로 시 세계를 구축한다면 그런 결과는 당연하다. 서효인의 경우는 어떨까. 시인은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고 있다. 시인이 이국적 정서, 한국적 정서를 구분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세계 공통의 정서로 시를 쓰기 때문이다.

각 나라나 인종, 문화가 갖는 고정된 정서는 시를 쓸 때나 읽을 때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작용하므로 서효인은 비유, 상징, 알레고리를 자제하면서 리얼리즘의 시가 가진 장점을 최대치로 올린 상태에서 정황을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근원적인 정서를 담백하게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서효인의 시 쓰기 '전략'은 과거 노동시나 참여시와는 다른 양상이다. 노동시나 참여시는 화자의 감정 노출이 심하거나 청자의 반응을 의식적으로 '의식'하는 일면이 있지만 서효인의 시에서는 그런 특징이 발견되지 않는다.

확실히 서효인은 '분노 조절'을 잘한다. 분노적인 정황을 포착하고도 그 분노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위트 있게 풍자적 기법으로 환기한다. 냉정한 관조자도, 적극적인 행위자도 아닌 제3의 화자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분노의 실상을 토해낸다.

'헤르체고비나 반성문'도 마찬가지다. 헤르체고비나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는 지역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한 부분이다. 이 지역은 세르비아계와 이슬람교를 믿는 민족들이 서로 나뉘어 전쟁을 하고 있었다(2011년 시집이 발간할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은 전쟁에 휩싸일 운명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갖는다. 그래서 화자는 전쟁용 참호를 파는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삽의 끝이 점점 둥그렇게 변할" 때까지, "삽을 쥔 손가락이 삽이" 될 때까지, "손을 달고 있는 팔이 삽이" 될 때까지 참호를 파야 한다. 그만큼 전쟁은 끊이질 않는다.

[사진=펙셀]

파야 하는 운명 앞에 화자나 동료는 삽이라는 상징적인 도구일 뿐이다. "상상해서 죄송"할 정도로 정신적 여유가 없이 살아야 하는 운명. 종교의 차이가 인간의 존엄성보다 앞서는 정치적ㆍ문화적 폭압 앞에서 인간은 말 한마디조차 삼가야 한다.

이 시는 동양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든, 기독교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든, 이슬람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든 간에 모두 공감할 수 있다. 이국적인 소재임에도 현장성이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의 근원적 본성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때문이다.

전쟁 상황에서 병사들은 전쟁의 목적이나 명분에 상관없이 오직 도구로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인권은 절대 보장받을 수 없다. 그런 상황과 심리를 서효인은 예리하게 포착해 자연스럽게 형상화했다. 적절한 인유와 탁월한 상상력을 통해 스케일이 큰 리얼리즘에 한 전범典範을 보여준 서효인의 시는 개성적으로 한국 시에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할 것이다.

2024년 8월, 지금도 분쟁지역이나 전쟁 지역이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종교적인 갈등이든 정치적인 갈등이든 사상적인 갈등이든 간에 그 지역에 태어난 사람들은 꿈을 펼쳐볼 기회조차 없이 도구적 인간으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필자가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을 소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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