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뭘 못해서 TV 토론을 망쳤나 [스프]
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 2024. 9. 14. 09:03
[뉴스쉽]
트럼프와 해리스는 각자 이번 토론에서 해야 할 것과 막아야 할 (또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 언론, 특히 보수 논객들은 트럼프가 이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방어로 토론을 이길 수는 없다."
조지 W.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공화당 전략가 칼 로브의 말이다. 이번 TV 토론에서 누가 공격의 주도권을 쥐었을까? 해리스였다. 두 사람이 쓴 시간을 봐도 그렇다.
뉴욕타임스가 두 후보의 발언 시간을 분석한 결과, 전체 발언 시간은 트럼프가 더 길었다. (트럼프 43분03초 vs 해리스 37분41초). 그런데, 상대방 공격에 쓴 시간은 해리스가 더 길었다. (해리스가 17분25초, 트럼프는 12분54초를 공격에 썼다.)
자신의 발언 시간 중 상대 공격에 쓴 비율을 따져보면, 해리스는 발언 시간 중 46%를 트럼프 공격에 썼다. 이번 선거는 '트럼프 심판 선거'라는 점을 부각하고, 자신의 정책 입장 뒤집기에 대한 해명은 최소화한다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반면 트럼프는 발언 시간 중 29%만을 해리스 공격에 썼다. 그럼 나머지 시간은? 해리스의 조롱에 발끈해서 억울함 호소하기, 자기 자랑하기, 음모론 제기, 팩트체크를 하고 나서는 진행자와 말싸움하기 등에 허비했다.
그 결과, 트럼프는 바이든 정부의 정책 실패 책임을 해리스에게 매섭게 추궁하지 못했다는 것이 미국 보수 논객들의 불만이다.
안 한 건 아니다. 그런데, '물가가 너무 비싸다', '불법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온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비난만 한다고 이슈 공격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숫자와 사례를 들어가면서, 유권자들이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스토리라인을 짜야 하는데, 트럼프의 현 정부 비판은 허공에 대포 쏘는 식이었다는 게 그에게 가해지는 비판의 요지다.
해리스는 시종일관 "이제 페이지를 넘기자", "(트럼프가 대통령이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가지 말자", "나는 계획이 있다", "나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맞받아쳤다. "해리스가 바이든이다", "계획이 있다고? 그런 좋은 계획이 있으면, 백악관에 있는 3년 반 동안 뭐하고 이제 와서 그러나?".
해리스에겐 뼈아픈 지적이지만 트럼프는 이 말을 너무 늦게 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마무리 발언 하는 순서에 와서야 트럼프는 "해리스는 바이든이다(SHE IS BIDEN!)"라고 외쳤다. 공화당 전략가들과 보수 논객들은 "저 멘트를 처음부터, 매번 발언 기회마다 했어야 했다"라고 탄식했다. 90분 토론의 85분째에 드디어 처음으로 저 얘길 꺼냈는데, 이미 TV 채널은 다 돌아간 뒤가 아니었겠냐는 거다.
바이든 정부는 따지고 보면 잘한 일도 많다. 그렇지만 미국 국민들은 지금 현실에 불만이 엄청 많다. 그게 이번 선거의 기본 조건이다. 민주당 해리스 선거캠프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물가가 너무 올랐기 때문이다. '투잡 쓰리잡을 뛰어도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물건이 점점 줄어든다'는 아우성이 넘쳐난다. 인플레이션은 잡혀가는 중이지만, 물가 상승률이 '둔화됐다'는 것은 물가가 '덜' 오른다는 것이지 물가가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실제로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지만, 이 문제는 논외로 하자.)
트럼프는 해리스가 바이든 정부의 일원으로서 이 문제에 책임이 있으며, 앞으로도 민주당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했다. 하지만 이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지 못했다.
물가 문제는 모든 유권자의 가장 큰 관심사이므로, 토론의 첫 질문으로 제기됐다. "미국민들이 4년 전보다 살기 좋아졌다고 생각하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해리스는 즉답을 하지 못하고 슬쩍 비껴갔다. 자신도 중산층 서민 출신이라면서, 소규모 사업자들과 아이 키우는 가정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정책이 있는지 등등을 언급했다. '유권자들의 시선을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돌린다'는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그러면서 해리스는 트럼프에 대한 비판으로 방향을 틀었다. 트럼프는 서민들이 아니라 갑부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감세 정책을 쓸 사람이다, 트럼프가 도입한다는 관세는 결국 물가를 올려 서민 가정들로 하여금 1년에 수천 달러의 소비세를 추가로 내게 만드는 나쁜 효과를 나타낼 거라고 공격했다.
트럼프는 처음부터 이 공격에 대한 방어를 해야 했는데, 그나마도 얘기하다 말고 '불법 입국자가 쏟아져 들어온다'는 문제로 스스로 새버렸다. 시간 배분을 봐도, 트럼프는 경제 이슈에 집중하지 못했다. 해리스는 경제 얘기를 6분06초 했는데 트럼프는 4분13초밖에 하지 않았다는 것이 뉴욕타임스 분석이다. 실시간으로 시청하면서 느끼기에도 트럼프는 '기승전 불법 입국자'였다. 그리고, 불법 입국자 문제를 얘기할 때 훨씬 어조가 강했다.
"4년 전보다 살기 좋아졌느냐는 질문에 왜 대답을 못 하느냐"고 해리스를 물고 늘어지지 못한 점에 대해, "트럼프가 귀중한 기회를 날렸다"고 월스트리트저널 논설위원들은 탄식했다.
해리스의 공약 중에는 정부 지출을 늘려 중산층과 서민에게 보조금을 주겠다는 성격의 정책들이 많다. 이렇게 지출을 늘리면 결국 정부 재정이 나빠지고 물가는 더 오를 수 있다는 비판을, 주류 경제학자들 중 상당수가 한다. 이런 점도 트럼프는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대통령 할 때는 미국 경제가 세계 최고였다. 그러니 내가 다시 대통령 해야 한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수준이었다.
트럼프의 나르시시즘은 심각한 수준이다. 자신에 대한 조롱이 들어오면 참지 못한다. 해리스는 이 점을 활용해서 트럼프를 탈선하게 만든다는 명확한 작전을 갖고 토론에 임했다. 어떤 말들이 트럼프의 '발작 버튼'으로 작용할지 철저히 준비해서 나왔다.
요즘 우리나라 소셜미디어와 방송 등에서 '긁'는다는 표현이 많이 쓰이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미국 단어가 '니들(needle)'이다. needle은 명사로는 '바늘'이고, 동사로 쓰면 '바느질을 하다', '바늘로 찌르다', '(바늘로 찌르듯) 상대를 어떤 행동으로 몰고가다', '(바늘로 찌르듯) 신경을 건드리다' 등의 뜻이 된다. 미국 언론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단어를 써서 해리스가 트럼프를 '갖고 놀았다'고 평가했다.
해리스는 트럼프가 자신을 공격할 때 썼던 단어나, 트럼프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는 것들을 일부러 골라 감정 도발을 시전했다. 트럼프는 와튼스쿨을 다녔는데, 그곳 교수들이 트럼프의 관세안을 비판했다고 했다. 트럼프는 부동산 사업가로 자수성가했다고 스스로를 포장하지만, 실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돈으로 쉽게 장사했고, 그나마도 여섯 번이나 파산한 적이 있다고 꼬집었다. 외국 지도자들은 모두 트럼프를 멸시하며, 트럼프를 국가원수이자 최고통수권자로 모셔야 했던 장성들은 그를 '국가의 수치'로 여긴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센 척하지만 사실은 독재자들 앞에 '약한(weak)' 사람이라며, 트럼프가 자신에게 썼던 수식어를 되돌려줬다.
결정적으로, 트럼프 집회는 헛소리로 가득 차 있고 따분해서 사람들이 듣다 말고 집에 간다고 조롱했다. 이번 토론 최대의 화제를 낳은 '불법 입국자들이 동네 개·고양이 잡아먹는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이 '집회 조롱'에 반박하던 끝에 나왔다.
해리스의 '조롱 작전'은 익히 예상됐던 일이다. 이미 8월 중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도 연사들은 트럼프를 다양한 방법으로 조롱했다. 트럼프 캠프가 이에 대비해 트럼프를 준비시킨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참지 못했다. 뻔한 공격은 -해리스가 그랬듯이- 흘려버리고, 자신이 해야 하는 공격에 집중해야 했는데, 감정적으로 발끈하는 바람에 시간을 엉뚱한 발언들에 허비했다.
미국의 선거 전문가들은 이런 말을 한다.
'TV 토론에서 이슈 하나하나, 발언 하나하나 갖고 승패를 따지기는 어렵다. 유권자들이 그런 식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가끔은 소리를 줄여놓고 화면만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누가 이기고 있는지 감이 온다.'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가 맞섰던 대선에서 공화당 선거 전략을 이끌었던 칼 로브는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에서, '그런 점에서도 이번 토론은 트럼프의 완패'였다고 평가했다. 카메라에 비친 모습으로 볼 때, 해리스는 차분하고 자신감 있으며 강하고 요점에 집중하고 미래를 얘기하는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트럼프는 열 받고 화난 모습으로 과거, 그것도 가까운 과거(바이든 임기)가 아니라 먼 과거(자신의 대통령 시절)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비쳤다는 것이다.
CNN 인터넷판도, '해리스는 TV로 송출되는 분할화면의 특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활용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토론의 규칙은 '상대 후보가 발언하는 동안 내 마이크는 꺼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마이크가 꺼져 있어도 내 얼굴은 분할화면으로 TV에 노출된다.
해리스는 다양한 표정을 지음으로써 트럼프의 발언에 대한 반응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했다. 자신이 말할 때는 정면을 응시해서 시청자와 직접 대화하는 느낌을 주고 트럼프가 말할 때는 트럼프를 보며 냉소-경악-기가 막힘 등의 표정을 지었다.
반면 트럼프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앞만 쳐다보고 있거나, 나중에는 치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 결과, 트럼프는 '더 늙었고, 짜증만 가득한 노인'으로 비치게 되었다. 지난 6월 TV 토론에서 트럼프가 바이든에게 씌웠던 바로 그 부정적 이미지다.
다수의 유력 매체들은 트럼프가 첫 15분은 그래도 잘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길을 잃고 해리스의 조종에 놀아났다고 평가했는데,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트럼프의 고령 탓'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지치고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정책이나 법률의 전문가는 아니라는 점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네 싶은 대목들이 토론에서 나왔다.
토론이 끝나갈 때쯤, 의료보험제도 개선에 관한 공방이 오갔다. 사회자는 트럼프에게 제도 개선을 위한 방안이 있는지 물었다. 트럼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개선할지) 계획은 없다. 계획의 컨셉이 있다. 나는 지금 대통령이 아니잖아!"
실시간으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트럼프는 이미 4년 대통령 임기를 한번 마쳤고, 4년의 준비를 거쳐 다시 백악관에 들어가겠다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내놓을 구체적인 대답이 없다니. 보수 성향 매체의 논객들도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지적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파편화된 뉴스는 이제 그만, 이슈의 맥락을 읽는 재미를 담았습니다.
지난 11일(미국시간 10일) TV 토론은 트럼프의 패배였다는 게 거의 모든 미국 매체들의 평가다. 친보수 성향인 월스트리트저널, 공화당 전략가인 칼 로브 같은 인물들조차 트럼프의 퍼포먼스가 형편없었으며, 선거 승리로 가는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고 트럼프를 혹평했다. 토론 직후 이틀간 실시된 여론조사(로이터-입소스)에선 해리스 47% : 트럼프 42%로, 같은 기관의 직전 조사보다 지지율 격차가 1%P 커졌다.
트럼프는 당초 해리스가 '혼자서는 인터뷰도 제대로 못 하는 저능아'라며 압승을 자신했는데 어쩌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됐을까?
지난 11일(미국시간 10일) TV 토론은 트럼프의 패배였다는 게 거의 모든 미국 매체들의 평가다. 친보수 성향인 월스트리트저널, 공화당 전략가인 칼 로브 같은 인물들조차 트럼프의 퍼포먼스가 형편없었으며, 선거 승리로 가는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고 트럼프를 혹평했다. 토론 직후 이틀간 실시된 여론조사(로이터-입소스)에선 해리스 47% : 트럼프 42%로, 같은 기관의 직전 조사보다 지지율 격차가 1%P 커졌다.
트럼프는 당초 해리스가 '혼자서는 인터뷰도 제대로 못 하는 저능아'라며 압승을 자신했는데 어쩌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됐을까?
해리스와 트럼프, 각자에게 주어졌던 임무는
해리스의 목표)
-사람들은 바이든 정부에 불만이 많다. 그 책임을 떠안지 않는다.
-유권자들의 시선을 '미래'로 향하도록 한다. '변화를 가져올 사람은 바로 나'라는 메시지를 심는다.
'대통령감'이라는 신뢰감을 준다.
-이번 선거를 '트럼프 심판 선거'로 만든다. 트럼프는 다시 대통령 하면 안 될,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걸 유권자들에게 상기시킨다. (트럼프 시절은 물가는 낮았을지 몰라도 나라가 시끄러웠고,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는 걸 상기시킨다.)
-푸틴이나 시진핑 같은 외국 독재자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을 강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는다.
지나치게 진보좌파적인 정책들을 지지했다가 뒤늦게 중도로 선회한다는 공격을 받겠지만, 거기에 끌려들어가지 않는다.
트럼프의 목표)
-해리스에게 바이든 정부의 실정 책임을 지운다.
-사람들이 가장 불만인 것은 경제다. (물가가 여전히 너무 비싸다.)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해리스에겐 없으며, 자신이 대안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부각한다.
-해리스가 이제 와서 중도 지향인 척하지만 사실은 평균적인 미국인들의 공감대보다 훨씬 좌파라는 점을 부각한다. (해리스가 실제로 그런지와는 별개로, 트럼프의 목표가 그것이라는 의미.)
-자신은 미치광이가 아니며, 다시 백악관에 들어가도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을, 안정감 있는 지도자라는 점을 보여준다.
-해리스는 머리도 나쁘고 유약한 인물이어서 대통령직에 부적합하다는 자신의 평소 주장을 입증한다.
미국 언론, 특히 보수 논객들은 트럼프가 이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트럼프는 방어하느라 바빴고, 공격의 주도권을 쥔 건 해리스였다
조지 W.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공화당 전략가 칼 로브의 말이다. 이번 TV 토론에서 누가 공격의 주도권을 쥐었을까? 해리스였다. 두 사람이 쓴 시간을 봐도 그렇다.
뉴욕타임스가 두 후보의 발언 시간을 분석한 결과, 전체 발언 시간은 트럼프가 더 길었다. (트럼프 43분03초 vs 해리스 37분41초). 그런데, 상대방 공격에 쓴 시간은 해리스가 더 길었다. (해리스가 17분25초, 트럼프는 12분54초를 공격에 썼다.)
자신의 발언 시간 중 상대 공격에 쓴 비율을 따져보면, 해리스는 발언 시간 중 46%를 트럼프 공격에 썼다. 이번 선거는 '트럼프 심판 선거'라는 점을 부각하고, 자신의 정책 입장 뒤집기에 대한 해명은 최소화한다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반면 트럼프는 발언 시간 중 29%만을 해리스 공격에 썼다. 그럼 나머지 시간은? 해리스의 조롱에 발끈해서 억울함 호소하기, 자기 자랑하기, 음모론 제기, 팩트체크를 하고 나서는 진행자와 말싸움하기 등에 허비했다.
바이든 정부의 실정(失政) 책임을 해리스에게 추궁하지 못했다
안 한 건 아니다. 그런데, '물가가 너무 비싸다', '불법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온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비난만 한다고 이슈 공격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숫자와 사례를 들어가면서, 유권자들이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스토리라인을 짜야 하는데, 트럼프의 현 정부 비판은 허공에 대포 쏘는 식이었다는 게 그에게 가해지는 비판의 요지다.
해리스는 시종일관 "이제 페이지를 넘기자", "(트럼프가 대통령이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가지 말자", "나는 계획이 있다", "나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맞받아쳤다. "해리스가 바이든이다", "계획이 있다고? 그런 좋은 계획이 있으면, 백악관에 있는 3년 반 동안 뭐하고 이제 와서 그러나?".
해리스에겐 뼈아픈 지적이지만 트럼프는 이 말을 너무 늦게 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마무리 발언 하는 순서에 와서야 트럼프는 "해리스는 바이든이다(SHE IS BIDEN!)"라고 외쳤다. 공화당 전략가들과 보수 논객들은 "저 멘트를 처음부터, 매번 발언 기회마다 했어야 했다"라고 탄식했다. 90분 토론의 85분째에 드디어 처음으로 저 얘길 꺼냈는데, 이미 TV 채널은 다 돌아간 뒤가 아니었겠냐는 거다.
경제 이슈가 제일 중요한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못했다
트럼프는 해리스가 바이든 정부의 일원으로서 이 문제에 책임이 있으며, 앞으로도 민주당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했다. 하지만 이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지 못했다.
물가 문제는 모든 유권자의 가장 큰 관심사이므로, 토론의 첫 질문으로 제기됐다. "미국민들이 4년 전보다 살기 좋아졌다고 생각하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해리스는 즉답을 하지 못하고 슬쩍 비껴갔다. 자신도 중산층 서민 출신이라면서, 소규모 사업자들과 아이 키우는 가정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정책이 있는지 등등을 언급했다. '유권자들의 시선을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돌린다'는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그러면서 해리스는 트럼프에 대한 비판으로 방향을 틀었다. 트럼프는 서민들이 아니라 갑부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감세 정책을 쓸 사람이다, 트럼프가 도입한다는 관세는 결국 물가를 올려 서민 가정들로 하여금 1년에 수천 달러의 소비세를 추가로 내게 만드는 나쁜 효과를 나타낼 거라고 공격했다.
트럼프는 처음부터 이 공격에 대한 방어를 해야 했는데, 그나마도 얘기하다 말고 '불법 입국자가 쏟아져 들어온다'는 문제로 스스로 새버렸다. 시간 배분을 봐도, 트럼프는 경제 이슈에 집중하지 못했다. 해리스는 경제 얘기를 6분06초 했는데 트럼프는 4분13초밖에 하지 않았다는 것이 뉴욕타임스 분석이다. 실시간으로 시청하면서 느끼기에도 트럼프는 '기승전 불법 입국자'였다. 그리고, 불법 입국자 문제를 얘기할 때 훨씬 어조가 강했다.
"4년 전보다 살기 좋아졌느냐는 질문에 왜 대답을 못 하느냐"고 해리스를 물고 늘어지지 못한 점에 대해, "트럼프가 귀중한 기회를 날렸다"고 월스트리트저널 논설위원들은 탄식했다.
해리스의 공약 중에는 정부 지출을 늘려 중산층과 서민에게 보조금을 주겠다는 성격의 정책들이 많다. 이렇게 지출을 늘리면 결국 정부 재정이 나빠지고 물가는 더 오를 수 있다는 비판을, 주류 경제학자들 중 상당수가 한다. 이런 점도 트럼프는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대통령 할 때는 미국 경제가 세계 최고였다. 그러니 내가 다시 대통령 해야 한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수준이었다.
해리스의 '감정 자극' 전술에 말렸다
요즘 우리나라 소셜미디어와 방송 등에서 '긁'는다는 표현이 많이 쓰이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미국 단어가 '니들(needle)'이다. needle은 명사로는 '바늘'이고, 동사로 쓰면 '바느질을 하다', '바늘로 찌르다', '(바늘로 찌르듯) 상대를 어떤 행동으로 몰고가다', '(바늘로 찌르듯) 신경을 건드리다' 등의 뜻이 된다. 미국 언론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단어를 써서 해리스가 트럼프를 '갖고 놀았다'고 평가했다.
해리스는 트럼프가 자신을 공격할 때 썼던 단어나, 트럼프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는 것들을 일부러 골라 감정 도발을 시전했다. 트럼프는 와튼스쿨을 다녔는데, 그곳 교수들이 트럼프의 관세안을 비판했다고 했다. 트럼프는 부동산 사업가로 자수성가했다고 스스로를 포장하지만, 실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돈으로 쉽게 장사했고, 그나마도 여섯 번이나 파산한 적이 있다고 꼬집었다. 외국 지도자들은 모두 트럼프를 멸시하며, 트럼프를 국가원수이자 최고통수권자로 모셔야 했던 장성들은 그를 '국가의 수치'로 여긴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센 척하지만 사실은 독재자들 앞에 '약한(weak)' 사람이라며, 트럼프가 자신에게 썼던 수식어를 되돌려줬다.
결정적으로, 트럼프 집회는 헛소리로 가득 차 있고 따분해서 사람들이 듣다 말고 집에 간다고 조롱했다. 이번 토론 최대의 화제를 낳은 '불법 입국자들이 동네 개·고양이 잡아먹는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이 '집회 조롱'에 반박하던 끝에 나왔다.
해리스의 '조롱 작전'은 익히 예상됐던 일이다. 이미 8월 중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도 연사들은 트럼프를 다양한 방법으로 조롱했다. 트럼프 캠프가 이에 대비해 트럼프를 준비시킨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참지 못했다. 뻔한 공격은 -해리스가 그랬듯이- 흘려버리고, 자신이 해야 하는 공격에 집중해야 했는데, 감정적으로 발끈하는 바람에 시간을 엉뚱한 발언들에 허비했다.
화면만 봐도 누가 밀리는지 알 수 있었다
'TV 토론에서 이슈 하나하나, 발언 하나하나 갖고 승패를 따지기는 어렵다. 유권자들이 그런 식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가끔은 소리를 줄여놓고 화면만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누가 이기고 있는지 감이 온다.'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가 맞섰던 대선에서 공화당 선거 전략을 이끌었던 칼 로브는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에서, '그런 점에서도 이번 토론은 트럼프의 완패'였다고 평가했다. 카메라에 비친 모습으로 볼 때, 해리스는 차분하고 자신감 있으며 강하고 요점에 집중하고 미래를 얘기하는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트럼프는 열 받고 화난 모습으로 과거, 그것도 가까운 과거(바이든 임기)가 아니라 먼 과거(자신의 대통령 시절)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비쳤다는 것이다.
CNN 인터넷판도, '해리스는 TV로 송출되는 분할화면의 특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활용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토론의 규칙은 '상대 후보가 발언하는 동안 내 마이크는 꺼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마이크가 꺼져 있어도 내 얼굴은 분할화면으로 TV에 노출된다.
해리스는 다양한 표정을 지음으로써 트럼프의 발언에 대한 반응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했다. 자신이 말할 때는 정면을 응시해서 시청자와 직접 대화하는 느낌을 주고 트럼프가 말할 때는 트럼프를 보며 냉소-경악-기가 막힘 등의 표정을 지었다.
반면 트럼프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앞만 쳐다보고 있거나, 나중에는 치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 결과, 트럼프는 '더 늙었고, 짜증만 가득한 노인'으로 비치게 되었다. 지난 6월 TV 토론에서 트럼프가 바이든에게 씌웠던 바로 그 부정적 이미지다.
다수의 유력 매체들은 트럼프가 첫 15분은 그래도 잘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길을 잃고 해리스의 조종에 놀아났다고 평가했는데,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트럼프의 고령 탓'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지치고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계획은 없고, 컨셉이 있어. 나 대통령 아니잖아!"
토론이 끝나갈 때쯤, 의료보험제도 개선에 관한 공방이 오갔다. 사회자는 트럼프에게 제도 개선을 위한 방안이 있는지 물었다. 트럼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개선할지) 계획은 없다. 계획의 컨셉이 있다. 나는 지금 대통령이 아니잖아!"
실시간으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트럼프는 이미 4년 대통령 임기를 한번 마쳤고, 4년의 준비를 거쳐 다시 백악관에 들어가겠다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내놓을 구체적인 대답이 없다니. 보수 성향 매체의 논객들도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지적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 hyunsi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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