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기시다와 홀로 남은 윤석열…한·일 밀월은 ‘짝사랑’ 이었나
‘성과’란 정부와 ‘잘못’이란 여론과 괴리…한국 차기 정부서 문제 될 듯
[주간경향] 2년여간 지속한 ‘애착관계’가 끝났다. 한쪽이 떠났고, 한쪽만 남았다. 두 사람을 향한 외부 시선이 걸림돌이었다. 나란히 10명 중 3명 정도의 지지만 받는 이들의 만남이 지속될 순 없었다. 관계에서 ‘갑’이란 평가를 받던 쪽이 먼저 자리를 떴다. ‘을’은 떠나는 ‘갑’의 환송연까지 살뜰히 챙겼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진심’이란 평가가 나왔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향한 윤석열 대통령의 마음이 이토록 각별했다.
지지율이 20%대로 내려앉은 윤 대통령에게 한·일관계 개선은 자부심이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한·일관계 정상화’를 언급한다. 지지율이 10%대까지 폭락하며 물러나게 된 기시다 총리도 한·일관계가 자부심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을 기시다 내각의 주요 성과로 꼽는다. 모두 한국의 동의를 받은 사안들이다. 외교는 “물컵에 물이 절반 이상 찼으니, 나머지 절반을 채워달라”는 식의 ‘순차 게임’이 아닌 가위바위보 같은 ‘동시 게임’에 가깝다. 국익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이상 양자관계에서 비기는 때도 없다. 결국 둘 중 한 명은 패배를 정당화하고 있거나 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착각하고 있다는 의미다.
퇴임을 앞둔 기시다 총리는 지난 9월 6~7일 이틀간 한국을 방문했다. 윤석열 정부를 상대로 한 지난 2년여간의 성과를 되돌아봤다.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와 함께 일군 성과는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됐다”며 “경제와 안보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정부 간 협의체는 모두 복원됐다”고 화답했다. 성과의 징표처럼 “올해 양국 인적 교류는 1000만명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두 정상의 자화자찬과 별개로 한·일관계를 보는 윤 대통령의 관점은 흥미롭다. 대통령이 인용하는 수치와 통계를 보면 더욱더 그렇다. 2024년 1월부터 7월까지 일본에서 한국을 방문한 관광객은 167만4952명(한국관광공사 데이터랩 통계)이다. 같은 기간 한국에서 일본을 방문한 관광객은 519만9800명(일본 관광청 통계)이다. 2024년 기준 한국 인구수는 약 5175만명이다. 일본은 약 1억2263만명이다. 일본이 2배 이상으로 많다. 그런데도 되레 관광객 수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방문한 수가 약 3배로 많다.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를 파탄 냈다고 비판하는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년, 일본에서 한국을 찾은 관광객이 327만1706명이었다. 복원했다는 한·일관계가 만성적 관광수지 적자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올해 월별 한국의 관광수지(관광수입-관광지출)는 단 한 번도 흑자인 적이 없다. 2024년 7개월간 누적적자 잠정치가 약 64억달러(약 8조5772억원)다. 결국 윤 대통령의 1000만명 교류 발언은 ‘일본의 성공적인 한국인 관광객 유치’에 박수를 친 것에 가깝다.
본래 ‘한·일관계 정상화’는 한·미관계 강화의 필요조건처럼 시작됐다. 정부 역시 ‘한·미·일 안보협력’과 연계해 그 당위성을 설명했다. 문제는 윤 대통령의 발언, 행보만 보면 목표와 수단의 구분이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를 ‘제3자 변제’ 방식으로 풀거나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찬성하는 것이 한·미관계 강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한 바 없다. 대신 “일본에 대한 열등감부터 벗어나라”는 핀잔만 쏟아냈다. 그 결과 ‘지난 2년여간 대체 일본이 양보한 것은 무엇이냐’는 물음만 남았다. 국정운영 성과가 ‘한·일관계’라는 주장이 비판받는 상황은 결국 윤석열 정부가 자초했다.
한국 외교의 목표가 일본인가
‘국민 10명 중 최소 6명이 부정적이다.’ 윤석열 정부 한·일관계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다. 쿠키뉴스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9월 7일부터 9일까지 전국 거주 만 18세 이상 남녀 1025명에게 물었다(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3.1%포인트). 잘 모름/무응답으로 답한 4.7%를 제외하면 정부 대일정책을 ‘잘하고 있다’고 평가한 국민은 10명 중 3명 정도다. 70대 이상, 대구/경북 지역을 제외하면 전 연령, 전 지역에서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 해당 조사는 기시다 일본 총리의 방한 직후 시행됐다는 점에서 윤석열-기시다 체제 이후 한·일관계에 대한 총평에 가깝다.
‘최고의 성과’라는 정부와 ‘잘못한다’는 국민 인식 사이의 괴리는 상당하다. 그 원인을 추론하기 위해선 윤석열 정부 출범 전후 한·일관계의 특성부터 살펴봐야 한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 원장은 크게 두 가지 구조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한·일 양국 내부 움직임이다. 정치적 갈등 상황만큼 양국 국민의 상호 인식이 악화된 것은 아니었고 인적·문화적 교류 흐름은 지속적으로 유지됐다는 분석이다. 이는 속도의 문제일 뿐 양국 관계는 회복될 수 있는 구조였다는 의미다. 윤석열 정부는 ‘제3자 변제’ 방식 등을 통해 회복을 인위적으로 가속화하려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작동하는 구조적 압력이다. 실제로 2022년 바이든 행정부가 발표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에는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 강화를 위한 10가지 액션플랜이 담겼다. 그중 하나가 한·미·일 3각협력 강화와 이를 위한 한·일관계 개선이다. 손 원장은 “양국 국민 사이의 관계개선을 위한 동력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받는 압력도 상당했을 것”이라며 “이는 윤석열 정부뿐만 아니라 문재인 정부에서도 공통적으로 작동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같은 압력을 받았지만 문재인-윤석열 두 정부의 대일정책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역대 한국 외교는 한·미·일 안보협력과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점을 갖고 있었다”며 “윤석열 정부만큼 한·미·일 공조를 강조한 이명박 정부도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적정선을 넘자 군사협력을 중단해 버린 것이 대표적이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이 균형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윤석열 정부 외교정책이 순환구조를 돌고 있기 때문이다. ‘전임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한 윤석열 정부는 자유·인권 등의 가치 동맹을 강조한다→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북한 등 가치동맹 열외국과 대립하는 최전선에 놓일 수밖에 없다→안보위협이 증가한다→한·미·일 삼각협력으로 대응해야 한다→이를 위해 자유·인권 등의 가치 동맹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순환구조 위를 몇 바퀴 돌다 보면, 증대된 위협에 대항할 안보협력 외에 남는 것이 없다.
한·일관계가 ‘성과’라는 정부와 ‘잘못’이라는 여론의 인식차도 이 지점에서 생긴다. 국민은 대일정책의 ‘균형점’을 체득하고 있다. 연평도 포격, 천안함 피격 등의 안보위협을 겪으며 학습한 결과다. 그런데 집권 2년여 만에 윤석열 정부가 이 균형점을 별다른 설명도 없이 넘었다. 국민 10명 중 6명이 윤석열 정부의 행보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 양 교수는 “윤석열 정부를 긍정하는 20~30%의 지지층이 외교정책을 이유로 꼽는 만큼 해당 기조를 되돌리긴 어려울 것”이라며 “일본에 더한 양보를 해서라도 이들 지지층이 원하는 반공의 최전선에 서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식의 괴리를 절차와 수단 문제로 지적하는 관점도 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한·일관계가 전방위적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안보·경제협력, 인적·문화적 교류 등이 가능해진 것은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면서도 “이를 추진하는 절차와 방법에 있어서 국민의 역사 문제에 대한 인식, 감정 등을 지나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방향이 맞아도 이를 추진하는 수단이나 절차가 미숙하면 외교정책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를 가장 우려하는 것이 사실 일본이다. 양 교수는 “외교관계에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일본 전문가들조차 불안하게 본다”며 “한국 정권이 바뀌면 기존 대일정책의 대전환이 일어나 오히려 관계만 악화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에 대한 대응이 발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누구냐’가 아닌 ‘방향성’
퇴임 직전인 기시다 총리의 이번 방한에서는 주목할 만한 장면들이 있다. 퇴임하는 총리가 내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의미를 강조하고, 향후 한·일협력 기조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떠나는 총리와 함께 아키바 다케오 국가안전보장국장도 회담에 배석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 자유민주당(자민당) 정권이 이어지는 한 안보협력 확대는 이어질 것이란 신호로 읽힌다.
실제로 ‘일본의 총리 교체로 한·일관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전문가들 대부분이 “기시다 총리 때와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일본 정치는 국회 다수당 대표가 행정부를 이끈다. 현재 일본 국회 다수당이 자민당이다. 오는 9월 27일 예정인 선거에서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사람이 10월 1일부터 일본 총리직을 수행하게 된다. 유력 후보는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 고이즈미 신지로 전 일본 환경상이다. 국내 언론 등을 통해서는 고이즈미 전 환경상이 부각되지만 판세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분위기는 박빙 상황에 가깝다. 박정진 일본 쓰다주쿠대 교수는 “누구도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하고 결선 투표로 가는 것이 유력해 보인다”며 “한국 입장에선 차기 총리가 이시바냐, 고이즈미냐라는 것보다 한·일관계가 과거와는 판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가 말한 변화의 핵심은 한국을 상대로 한 일본 외교정책이 더 이상 총리 개인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과거처럼 역사 문제 해결에 전향적 태도를 가진 총리가 집권해 한·일관계가 반전을 맞는 일은 없을 것이란 의미다. 총리 개인의 생각을 대신할 외교정책의 중심에는 과거 식민지 지배 사실을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이 담긴 ‘1998년 한·일공동선언’,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입안한 ‘국가안전보장 전략’이 있다. 실제로 기시다 총리는 해당 수단들의 활용법을 잘 보여줬다. 우선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구체적 언급 없이 “1998년 일·한 공동선언을 포함하여 역사 인식 관련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로만 끝냈다. ‘국가안전보장 전략’ 관련해서는 한·일 간 안보협력 증대를 추진 중이다. 이를 이른바 ‘적극적 평화주의’라고도 하는데 그 끝에는 평화헌법 개정 및 일본 재무장이 있다.
일본의 다음 총리가 이시바든 고이즈미든 해당 전략은 계승·발전될 전망이다. 문제는 다시 한국이다. 이미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양보’로 일관했다. 이제 와서 정부가 되돌리기는 어렵다. 실책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안보협력 측면에선 윤석열 정부가 더욱 적극적인 모양새다. 이로 인해 제기되는 우려도 있다. 윤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한·일 군사동맹’ 체결까지 가능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양 교수는 “한국만큼 경제력·군사력을 갖춘 중견국이 이 정도로 양보만 하는 경우는 외교사적으로도 굉장히 희귀한 사례”라며 “외교정책이 한 번 정해지면 뒤집기가 너무나 어려운 만큼 이는 한국 차기 정부에서도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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