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상부터 주방 인테리어까지…‘미니어처 월드’에선 내 마음대로
“송편 만들어보셨어요? 재료만 다를 뿐 모든 과정이 실제 요리랑 똑같아요.” 새하얀 점토에 초록색 아크릴물감을 한 방울 똑 떨어뜨렸다. 밀가루를 반죽하듯 찰흙을 조물조물 뭉쳐가며 물감과 고루 섞었다. 점토가 쑥색으로 변했을 때, 반죽을 떼어 송편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 숨까지 잠시 멈추고 완전히 집중해야 한다. 힘이 조금이라도 과했다간 점토가 뭉개져버리고 만다. 이렇게 손가락 끝의 감각에 온 신경을 쏟아 점토를 만지다 보니 어느새 크기가 0.5㎝ 남짓, 손톱보다도 작은 ‘미니어처 송편’이 완성됐다.
추석 명절을 앞둔 지난 3일 ‘미니어처’(miniature)를 활용한 색다른 추석상을 차려보기 위해 서울 종로구 효제동의 미니어처 공방 ‘미니미니밍’을 찾았다. 미니어처는 실제 크기보다 매우 작게 물건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예전에는 작은 인형들을 위한 배경이나 소품 정도로 미니어처가 활용됐다면, 요즘은 미니어처 그 자체가 취미생활의 주인공이 된 경우가 많다.
식재료로 만든 뿌팟퐁 커리, 티라미수
미니어처에 푹 빠져 살다 단순한 취미생활을 넘어 이곳 공방까지 차린 박미진(40) 작가는 자동차도, 집도 뭐든지 큰 게 좋은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작을수록 매력적인’ 미니어처의 세계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박 작가는 “손바닥 크기의 점토 한 덩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며 “평소 좋아하는 음식은 물론,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의 물건이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공간을 작게 만들어 오래도록 보관하려는 사람들이 공방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름 3㎝의 작은 접시 위에 초록색, 핑크색, 하얀색 미니어처 송편을 갖춰 올리니 추석 느낌이 물씬 났다. 추석상에 전이 빠지면 아쉽다. 미니어처 전 중에서도 색이 다양해 만들기 가장 까다롭다는 ‘삼색꼬치전’을 곁들여 송편과 함께 장식하기로 했다.
역시 꼬치전은 만드는 과정이 실제처럼 손이 많이 갔다. 진짜 전을 만들듯이 점토로 노란 단무지와 게맛살, 대파, 햄까지 갖가지 재료를 준비한 뒤 가늘게 잘라 철사에 꽂았다.
미니어처 작업에서는 ‘디테일’이 생명이다. 밀가루와 달걀물 부침의 느낌을 내기 위해 점토를 얇게 펴 발라 덮으니 실감 났다. 투명한 액체인 ‘레진’을 프라이팬과 전 위에 덧발라 부침 요리의 핵심인 기름 느낌도 내며 상차림이 마무리됐다.
요즘 이 공방에는 추석을 앞두고 차례상 모형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문의가 많다. 박 작가는 “점토로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과 술로 미니어처 차례상을 차리거나,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처럼 옛날부터 고인이 평소 소중하게 간직했던 물건들을 작게 만들어 납골당에 두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점토를 활용해 ‘진짜처럼’ 만드는 미니어처에서 한발 나아가 최근에는 진짜 재료로 미니어처 음식을 만드는 경우도 생겼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서는 ‘미니어처푸드’(#miniaturefood)라는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세계 각국의 미니어처 마니아들이 올린 실제 요리 게시물이 넘쳐난다. 피자나 카레를 만들거나, 실제 미니 청경채에 굴소스를 곁들이는 광둥 요리 등 미니어처로 다양한 국적의 요리를 만들며 공유한다.
‘미니어처 마니아’인 이정아(43)씨는 ‘미니 조은’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실제 미니어처 음식 조리 과정을 업로드하고 있다. 작은 크기의 양파와 당근을 미니어처 칼로 잘라 볶은 뒤 카레 가루를 넣고 보글보글 끓여 뿌팟퐁 커리를 만들거나, 손가락만한 미니 해삼과 작은 꽃게로 미니어처 해삼 해물라면을 끓이는 영상이 대표적이다.
지금까지 이씨가 만든 미니어처 음식은 100종이 넘는다. 바지락찜이나 된장찌개 같은 한식 요리부터 고로케 튀김, 티라미수 케이크까지 분야를 넘나들며 미니어처 음식을 만들고 있다. 미니어처 음식이라 결과적으로는 기껏 만들어 한입에 털어 넣으면 끝나버린다. 그러나 애초에 미니어처 음식의 용도는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만드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인 만큼 실제 음식을 하듯 온 정성을 다한다.
“머리 복잡해질 때 미니어처 작업 시작”
이씨는 일주일에 한번, 아무도 없는 조용한 주방에서 미니어처 음식을 만든다. 한 종류의 미니어처 음식을 만드는 데만 보통 3시간 이상 걸린다. 꽤 고된 작업이지만 이씨에겐 일주일 중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다.
“큰 요리는 재료도 크고, 준비 과정도 벅차게 느껴져서 도전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데 작은 요리는 무엇이든 다양하게 도전해볼 수 있잖아요? 귀엽다며 신기해하는 주변 반응도 무척 재미있고요. 내 손안에 쏙 들어오는 요리라니, 귀엽고 사랑스럽잖아요.”
이씨는 완성도 높은 미니어처 요리를 만들기 위해 재료도 직접 키우고 있다. 집 베란다에 작은 농장을 만들어 무와 양파, 방울토마토, 애호박 등을 키운다. 미니어처 요리를 위해 농작물이 다 자라기 전 작은 상태에서 수확해 재료로 활용한다. 미리 재배해버리면 맛이 덜한 경우도 많아 엘이디(LED)등까지 설치해 식물에 고루 쬐어주며 공을 들인다. 크기가 작아도 제법 비슷한 맛이 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씨는 다음엔 베이킹에 도전할 계획이다. 베이킹은 정확한 계량이 생명이라, 미니어처로 만들기가 가장 까다롭다. 오븐에 넣어도 다 녹거나 터져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그만큼 성취감도 대단해요. 저는 주부이지만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젠 아니에요. 이렇게 작은 요리를 저처럼 누가 쉽게 해내겠어요? 미니어처 작업을 하다 보니 삶에 대한 자신감까지도 생긴 것 같아요.”
손바닥 크기의 작은 공간 안에 손수 만든 것들을 채워가며 아늑한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마음의 평온과 위안을 얻는 사람들도 많다. 17년 전 미니어처 세계에 처음 입문했다는 이현숙(48)씨는 “미니어처 작업은 내 인생의 힘든 시기를 헤쳐나가게 해준 고마운 은인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미니어처를 좋아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주부”라고 본인을 소개하며 ‘소소한 작은 밥상’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실제 주방과 비슷한 미니어처 세트장을 만들어 다양한 미니어처 요리를 만드는 영상을 올리고 있다.
“어머니가 편찮으셨을 때 마음이 참 힘들었는데, 미니어처를 만들며 불필요한 걱정을 씻어내고 마음의 위안을 얻었어요. 작게 만들어보고 싶은 실제 물건의 크기를 측정해서 일정한 비율로 축소시켜가며 만들어요. 완성된 뒤 분주하게 공간에 채워 넣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들이 싹 사라져요. 요즘에도 머리가 복잡해지는 일이 생기면 조용한 공간에서 미니어처 작업을 시작해요.”
최근 이씨는 현실감 넘치는 ‘미니어처 주방’을 만드는 작업에 한창이다. 백패킹용 버너를 이용해 진짜 불이 켜지는 가스레인지를 만들고, 소형 어항에서 쓰는 작은 모터로 진짜 물이 나오는 싱크대를 만드는 게 목표다. ‘미니어처 요리’ ‘미니어처 주방’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 모든 제작 과정과 결과물을 에스엔에스(SNS)에 꾸준히 업로드할 계획이다.
“우리 나이의 장년층들은 어릴 적에 인형놀이를 마음껏 못 하며 컸잖아요. 미니어처 세상에선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게 매력이에요. 주방만 해도 실제 인테리어는 비용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엄두가 나지 않잖아요. 하지만 미니어처의 세상에선 내가 꿈꾸던 것들을 뭐든지 표현할 수 있어요. 내가 꿈꾸는 공간이 내 능력이 허락하는 한 진짜 현실이 되는 거죠.”
“직장 스트레스 심했는데 힐링됐다고”
최근에는 한층 독특한 소재로 미니어처를 만드는 마니아층도 생기고 있다. 서울 양천구에서 3년째 라탄 미니어처 공방을 운영하는 신영주(36) 작가는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야자과 덩굴인 ‘라탄’을 활용해 미니어처 의자와 침대, 수납장, 피크닉 바구니, 케이크 스탠드 등을 만들고 있다.
5년 전 우연한 기회에 미니어처를 접한 뒤 실물과 똑같이 미니어처 제품을 만드는 것에 푹 빠져들었다. “큰 것과 거의 똑같이 미니어처를 만들어냈을 때 단순한 뿌듯함을 넘어선 희열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때부터 시작된 거죠. 그런데 저는 점토나 물감이 손에 묻는 느낌이 좋지는 않았어요. 나만의 방식대로, 좀 더 개성 있는 소재로 미니어처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고민하다가 ‘라탄’을 선택하게 됐어요.”
그 어느 재료보다 정밀한 묘사가 가능하다는 게 라탄 미니어처 공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일반 점토 미니어처는 정교하게 만들더라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질감이나 색상 등에서 조형물인 것이 드러나기 쉽다. 하지만 라탄 미니어처는 진짜 라탄을 소재로 큰 제품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올 한올 엮어 만들기 때문에 아무리 확대해서 보더라도 실제 크기의 제품과 차이가 없다. 신씨는 “이런 재미 때문에 큰 제품과 작은 제품을 동시에 만들어 함께 사진을 찍으며 ‘놀이하듯’ 라탄 미니어처 공예를 즐기는 분들도 많다”고 전했다.
라탄 소재를 활용해 ‘1인용 미니어처 의자’를 만드는 데만 7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시간이 꽤 걸리는데도 주말마다 라탄 작업을 위해 공방을 찾는 이들로 붐빈다. “최근에는 부산에서 ‘미니어처 라탄 여행가방’을 만들기 위해 1박2일 일정으로 공방을 찾은 분이 계셨어요. 직장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하얀 라탄 가방을 정성껏 엮은 뒤 미니어처를 손바닥에 올려두는 순간 상처받은 마음이 힐링됐다고 좋아하시더라고요.”
신씨는 라탄에 이어 가죽 미니어처도 시작했다. 정말 ‘손톱’만한 크기의 인형 신발을 가죽으로 만든다. 가죽 미니어처 신발 역시 실제 가죽 신발을 만드는 과정과 똑같다. 가죽시장에서 골라온 가죽을 재단하고, 실을 꿸 수 있도록 타공하고, 염색하고 말려가며 꼬박 3시간을 들여야 한켤레가 완성된다.
둥근 코의 가죽 신발을 보면 옛날 동화 ‘구두장이와 요정들’ 속 구둣방 할아버지가 자신의 일을 도와준 요정들에게 만들어준 신발이 떠오를 정도로 앙증맞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 나무줄기로, 이 평평한 가죽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싶지만 인내심을 갖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앙증맞은 미니어처들이 완성돼 있다고 한다.
“라탄과 가죽으로 집중해서 미니어처를 만들다 보면 다른 세상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인내하며 집중하다 보면 앙증맞은 결과물이 생겨나는 것, 그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미니어처의 매력이에요.”
종로구 공방에서 1시간30분의 미니어처 제작이 끝나자 그럴싸한 추석 상차림이 완성됐다. 비록 먹을 수는 없지만 대신 눈으로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상차림이다. 정성스레 차린 나만의 상차림을 투명한 아크릴 상자에 조심히 포장하는데 박 작가가 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꽤 어려운 작업이었죠? 뭐든지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무작정 쉽게 봐서도 안 돼요. 아무리 작아도 그 안에는 누군가의 정성과 땀 흘린 시간들이 오롯이 담겨 있는 거거든요.”
장선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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