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민중의 삶… 지배계급의 위선·탐욕의 끝은
민중사관의 관점서 신랄하게 비판
애민·사림·사대 등 5개의 테마 중심
조선 500년사 민중의 눈높이서 해석
가슴속 흐르는 민중 민주주의 자부심
1919년 민주공화정 선포로 꽃 피워
조선 500년의 거짓말 ― 민중의 눈으로 다시 쓴 조선 역사/ 김학준/ 인문서원/ 2만5000원
‘민중을 배제하고 나면 그 시대 역사는 절반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역사의 주체를 지배계급으로 국한한 역사는 절반의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 저자의 믿음이다.
“대다수 역사 서적이 다분히 편향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해온 주제들을, 조선 민중의 입지와 눈높이에서 다르게 해석하고 싶었습니다.”
조선의 임금과 양반 사대부들이 중국을 지극정성으로 사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약소국의 군신으로서 왕조와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과연 사실일까? 그 주장의 진실은 조선 창업 초기, 즉 태종 즉위 당시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사대는 멀리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어온 관행이며, 그것이 나라 안에 미치는 영향 또한 만만치 않게 컸다. 하지만 사대가 외교 관행을 넘어 군주의 정통성을 결정하고, 왕권을 좌우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조선왕조가 유일하다. 조선 땅에서 사대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임금 자리도 위협받을 수 있는 정치적 모험이었고, 정적들에게 반역을 시도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중국과의 관계가 외교의 전부나 다름없는 조선의 현실에서 대중국 외교정책은 곧 주종 관계를 의미했고, 독자적·자주적 외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선의 지배계급은 국제 정세에 현명하고 냉철하게 대처할 능력을 거세당한 상태에서 나라를 다스린 셈이다. 훗날 근대의 거센 파도 한복판을 표류하던 조선이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 앞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다가 주권을 상실했던 것도 이런 사대 관행이 빚은 결과다.
◆반정(反正), “바른 상태로”라는 거짓말
조선의 지배계급은 기본적으로 백성을 착취함으로써 왕조 체제와 통치 질서를 유지했다. 백성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이 꼭 필요했던 이유다. 백성들이 죽지 못해 들고일어나기라도 하면, 언제나 민란으로 규정해 무자비한 진압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나 조선 민중의 의식은 비록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성장했다. 평안도 민중항쟁을 시작으로 영원할 것만 같던 지배 질서에 균열을 내기까지, 조선 민중은 봉건 지배의 사슬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한편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려는 길고 고단한 여정을 묵묵히 걸어왔다. 특히 19세기에 벌어진 조선 민중의 싸움은 엄격하면서도 자발적인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며 진행되었다. 대표적 사례가 갑오년 농민전쟁과 그 시절의 집강소 농민 자치다. 이렇게 싹튼 조선 민중의 저항 정신과 민중 민주주의 구현의 자부심이 우리 가슴속 깊은 곳을 흐르다가 1919년에 이르러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정 선포로 꽃을 피우게 된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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